'동서 냉전은 끝났으며 인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인간이 짜낸 최고의 지혜에 도달해 역사 이후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고 호언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에게도 9·11 테러는 적잖은 충격이었던가 보다. 하기야 ‘역사의 종말’에서 예술도 철학도 없어지고 앞으로 수세기 동안 ‘지루함’만 계속될 것이라던 그의 생각은 9·11로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고 해야 할 판이니까. 어쨌든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나 자본주의의 천하통일을 축하하기 앞서 세계는 국제평화와 국가안의 위협이라는 새롭고, 또 매우 절박한 환경을 맞은 것이 분명하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국제학대학원의 정치경제학 석좌교수를 맡고 있는 후쿠야마가 ‘강한 국가의 조건’(원제 ‘State-Building’)이라는 책에서 현 국제사회를 정치학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한 것도 다분히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 책은 조지 W 부시 정권의 이념 기반을 제공한다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 계열 학자의 저서답게 철저하게 미국 등 이른바 ‘강한 국가’가 중심이 되어 어떻게 세계평화를 구축해 갈 것인가 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후쿠야마의 해법은 요약하자면 아프가니스탄이나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처럼 ‘실패한 국가’의 국가역량강화를 위해 국제사회가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후쿠야마에 따르면 21세기 국제사회의 최대 고민은 국가의 제도적, 조직적 기능과 능력을 상실해 개별 집단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실패한 국가’ 때문에 생겨난다. 동티모르와 북한, 유고, 아프리카 각국과 아프가니스탄이 그런 나라들이다. 그는 나아가 한 나라의 역량부족은 그 나라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전쟁과 난민 발생 가능성을 높여 주변국과 국제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본다. 9·11 테러는 바로 그런 위협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그래서 ‘정통성 있는 합법적 권력을 취합하여 목적에 맞게 배치’해 위험 요소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국가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국제사회가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후쿠야마는 일방적인 원조, 제도나 공공정책의 이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원조 수혜국의 능력부족이나 부정부패, 또 수혜 혜택을 높인다는 이유로 그 나라 정부를 우회한 원조는 길게 봐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다, 공공행정과 조직이론은 학문이라기보다는 기술차원의 것이어서 전수나 이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1990년대에 소말리아, 아이티, 캄보디아, 보스니아, 코소보, 동티모르 등지에 간여한 미국이나 국제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정부 수립에 별스런 진척을 보지 못했다며 ‘국제공동체와 다수의 NGO들은 극도로 약한 대상 국가의 국가 역량을 보완하기보다는 오히려 붕괴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셈’이고 결국 ‘외부세력이 통치기능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국가 고유의 역량이 증가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합당해 보이는 그의 논리는 하지만, 일반론을 넘어서는 순간 부시 정권의 외교정책과 묘하게 접점을 형성한다.
‘부시 행정부는 우선 바그다드가 가할 수 있는 실제적인 안보위협에 대한 억지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고, 게다가 이라크와 테러리스트라는 두 집단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정확히 고려하지 않고 이라크가 야기하는 위협과 테러리스트의 위협을 하나로 간주해버렸다’고 비판하면서도 ‘대량살상무기를 최초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서는 억지 전략이 통하지 않는다’며 ‘그러한 위협을 제거하고 다시는 그런 위협을 못하도록 해당 국가에 들어가 그 나라의 통치를 인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실패한 국가’를 강한 국가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위협에 대처하는 그의 방식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