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새벽 어둠이 감싸 고즈넉했던 포구는 밝아오는 붉은 빛에 금새 꿈틀대기 시작한다. 경북 울진 죽변항의 아침은 생동하는 남성의 힘으로 깨어난다.
잔잔한 수면을 가르고 어선 한 척이 포구 한 쪽의 수협 공판장으로 들어서자 드럼통 장작불에 몸을 녹이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밤새 거친 바다에서 조업한 어선들이 '동해의 보물' 대게를 풀어놓는 시간이다.
선원들은 배 밑바닥에서 바구니 가득 대게를 들고 나와 조심스레 공판장 바닥에 폈다. 발랑 뒤집힌 게들은 허연 배를 하늘로 향한 채 학교 운동장의 조례 행사 마냥 크기 순으로 줄줄이 늘어섰다.
얼추 정리가 됐다 싶으니 수협 직원인 당당한 풍채의 경매사가 번호가 적힌 까만 모자를 쓴 중매인들과 함께 나타났다. 대게 한 묶음씩을 가리키며 입찰이 시작됐다. 중매인들은 경매사를 둘러싸고 손바닥을 슬쩍슬쩍 내보인다. 손바닥으로 감싼 뚜껑이 달린 나무판자에 입찰 금액을 분필로 적어 보여 주는 것. 경매사는 금새 눈으로 훑고는 굵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낙찰가를 읊는다. 중매인 한 명이 조금 늦게 손바닥을 내밀기라도 하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진다.
입찰이 모두 끝나면 중매인을 통해 물건을 산 상인들이 대게를 실어 갈 차례. 우르르 몰려 든 사람들은 비싼 대게가 다리 하나라도 부러질까 조심스레 수레에 싣고 떠났다.
그 빈자리는 몇 분 가지 못한다. 만선의 배들은 잇달아 들어오고 공판장 바닥은 오후까지 쉴 새 없이 대게 사열행사를 맞는다.
울진의 항구가 대게로 흥청거리고 있다. 12월부터 5월까지가 대게를 잡아들일 수 있는 기간이지만 대게가 가장 맛있을 때는 바로 이맘때. 3월의 대게는 속살이 꽉꽉 들어차 묵직하고 단단하다.
여기저기 새 길이 뚫렸다고 하지만 아직도 울진은 4시간 이상 차를 달려야 하는 먼 곳이다. 하지만 '게의 귀족' 대게의 맛을 아는 식도락가에게 그 정도는 약간의 수고일 뿐이다.
딱딱한 껍질 속에 동해의 시퍼런 생기를 온전히 품은, 부드러운 속살의 떨림. 지금 그 은근한 바다의 맛에 온몸이 사무치지 않는가. 그럼 바로 울진으로 출발하자.
죽변항(울진)=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울진 대게 | 지금이 제 철 저-맑은 바다가 귀하게 키운 대게 ‘부르는 게 값’
"9, 10월엔 송이 때문에 그러더니 이제는 대게를 보내달라고 성홥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챙겨주다 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요즘 경북 울진 주민들의 싫지 않은 푸념이다. 송이가 육지의 귀한 선물이라면 대게는 바다가 주는 축복의 선물. 전국에서 생산되는 대게의 50%가 울진에서 나온다. 이렇게 축복 받은 땅 울진은 얼마 전 동해안을 휩쓴 눈폭탄을 크게 얻어맞았다. 하지만 대게 출하에는 큰 어려움은 없단다. 피해 지역이라 눈치 보인다고 일부러 피하려 한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게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되는 법이다.
대게는 크다(大)해서가 아니라 8개의 다리가 대나무처럼 곧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죽해(竹蟹)라 한다. 대게는 귀한 만큼 잡는 것도 엄격히 제한됐다. 몸통의 지름이 9cm가 넘지 않으면 도로 바다에 놔줘야 하고 ‘빵게’라 부르는 암컷 또한 잡을 수 없다. 산란기에는 출어가 금지돼 11월부터 5월까지만 어획이 가능하다. 다른 곳과 달리 울진 어민들은 이중 11월 또한 자율 금어기로 정하고 대게의 살이 오르길 기다린다.
울진에서 잡히는 대게는 주로 죽변항과 후포항으로 모여든다. 싱싱한 대게를 가장 싸게 먹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두 곳이다. 항구 주변의 횟집 등 모든 음식점들이 대게를 찌는 찜통을 갖추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아침 수협공판장에서 형성되는 대게의 가격은 조금씩 다르다. 날씨에 따라 배가 못나가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주변 횟집은 이 시세에 영향을 받긴 해도 대체로 일정한 편이다. 요즘에는 몸통 9cm짜리 가장 작은 게 마리 당 1만원 정도. 보통 1만5,000원~3만원 정도가 많이 나간다. 더 큰 대게를 고집할 때는 7만~8만원도 감수해야 한다.
또 대게 중의 대게인 ‘박달게’는 부르는 게 값이다. 속이 꽉 차고 약간 검은 빛이 도는 박달게는 배 한 척이 나가도 몇 마리 건지지 못하는 귀한 몸이다. 작은 것도 최소 10만원, 큰 것은 20만원까지도 호가한다.
간혹 일부 가게에서 북한산이나 러시아산 대게를 섞어 내오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죽변항 수협공판장 옆 ‘뉴태평양횟집(054-782-4936)’이 믿고 먹을 만하다. 내놓는 밑반찬도 안주인의 고운 얼굴 만큼이나 정갈하다. 대게 철에는 울진의 택배업체들도 불이 난다. 울진까지 오지 못하는 분들은 ‘뉴태평양횟집’이나 ‘해인상사(054-782-2340)’ 등에 주문하면 바로 받을 수 있다.
대게를 먹었으면 울진의 긴 바다를 달려보자. 죽변항이 내려다 보이는 죽변등대 옆에는 드라마 ‘폭풍속으로’ 촬영 세트장이 자리잡고 있다. 죽변항은 봉평해수욕장과 이어졌다. 해송과 갯바위가 멋진 조화를 이룬다.
7번 국도 울진남부IC 아래 왕피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예전 군부대 자리로 올 7월 열리는 2005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 준비 때문에 공사가 한창이다. 청정 자연을 갖고 있는 울진군이 벌이는 세계적인 행사다.
왕피천을 넘으면 바로 관동팔경중 하나인 망양정이다. 한 5분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여기서 보이는 바다는 규모가 다르다. 하늘보다도 넓어 보이는 푸른 바다, 파도 소리의 호흡도 그만큼 길다. 망양정에서 해안도로를 타면 바다를 차창에 달고 오산항까지 내처 달릴 수 있다.
평해읍 초입에선 또 다른 관동팔경인 월송정을 만난다. 솔숲과 바다와D 어우러진 폼이 의젓한데 현판이 최규하 전 대통령 글씨다. 대통령 글씨는 이곳에도 붙어있다.
직산항으로 들어서면 후포항까지 좁지만 한적한 해안도로를 탈 수 있다. 중간에 있는 거일항은 울진군이 대게 원조마을로 지정한 곳이다. 이 마을 바로 앞바다에 동해안 대게가 밀집해 서식한다는 왕돌초가 있다.
모래사장과 암벽을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는 작고 조용한 항구들을 지난다. 방파제 위의 하얗고 빨간 등대가 나란히 서서 서로를 속삭이는 듯하다. 중간 중간 지나는 해안초소 건물은 해풍에 삭고 페인트 칠이 벗겨진 채 서있다.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그 모습은 이제 바다와 뗄 수 없는 한 폭의 풍경으로 자리잡았다.
울진 해안도로 여행의 끝, 후포는 죽변 못지 않게 큰 항구다. 이곳에서 4월 2일부터 3일간 제6회 울진대게축제가 열린다.
울진=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대게 구별 법 서울의 길거리 트럭에서 대게라고 파는 다리부터 배까지 온통 붉은 게는 영락없는 홍게다. 홍게는 대게보다 깊은 바다에 살며 껍데기가 두껍고 살이 적다. 가격과 맛은 대게와 비교가 안 된다. 울진대게는 껍질이 얇고 노란 분홍빛이 돈다. 쪄놓으면 껍질은 주홍색 배쪽은 흰색에 가깝다. 대게 껍질에 하얀 반점의 석회가 붙어있다면 러시아산이다. 북한산은 국산보다 검은빛을 띈다. 대게는 들었을 때 묵직하고 힘차게 움직이는 것, 배를 눌렀을 때 단단한 것을 골라야 한다.
●대게 찌는 법 아무리 대게를 잘 골랐어도 제대로 찌지 않으면 헛일. 살아있는 채로 찌면 다리가 다 부러진다. 대게가 살겠다고 발버둥치기 때문. 미지근한 민물에 담가 죽은 것을 확인한 후 찜통에 올린다. 특별히 간을 맞출 필요는 없다. 배를 반드시 위쪽으로 놓는다. 배가 아래쪽이면 찔 때 아까운 내장과 진액이 흘러 내린다. 15분 정도 찐 다음 불을 끄고 뚜껑을 닫은 채 15분을 더 놔둔다. 먼저 뚜껑을 열면 내장이 다리 쪽에 번지면서 굳어버리고 다리의 살이 검게 변한다. 택배로도 쪄놓은 대게를 살 수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