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이은주씨의 자살로 우울증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홍콩배우 장궈룽, 작가 헤밍웨이, 화가 고흐 등도 우울증을 앓다 목숨을 끊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평생을 우울증과 싸웠답니다. 서울 명동에서 시민 100명에게 ‘세계보건기구(WHO)의 우울증 진단문항’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응답자 100명 중 71명이 우울증과 관련 있으며, 이 중 56명, 즉 서울시민의 56%가 ’우울증 위험군’으로 분류됐습니다." 1일 모TV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 특집의 일환으로 방송한 내용이다.
편집국 사회부에 올라오는 기사 가운데 자살 사건이 우울증 만큼이나 흔하다. 조용히 목을 맨 경우는 대부분이 ‘우울증 의심’이다. 기사 중엔 사망자가 우울증을 앓아 왔음을 명시(혹은 암시)하고 있으며, 기사의 끝은 한결같다. "경찰은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라,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원인을 조사 중이다"이다.
1일 한 주택에서 A(29·여)씨가 목을 매 숨졌다. 그의 친구는 "A씨가 얼마 전 전화를 걸어 와 ‘이은주를 보니 나도 빚에서 해방될 방법을 찾았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3년 전 은행융자를 얻어 집을 샀으나 빚이 1억원 이상으로 늘어나 집이 경매에 넘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5일 한 경마장에서 기수 B(25·여)씨가 목을 매 숨졌다. 유서에 "우울증 때문에 살 수 없다. 체중을 더 줄여야 하는데…. 열심히 해도 돌아오는 것은 질책 뿐이다"고 적었다. 그는 낙마 부상으로 훈련 못 한 것을 고민해 왔으며, 체중감량 약을 오래 복용해 건강이 악화한 것을 비관해 왔다. 이틀 뒤 같은 장소에서 후배 C(20·여)씨가 목을 매 숨졌다. "언니(B씨)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알게 됐어요. 저도 너무 견디기 힘들어요"라는 유서가 발견됐다.
7일 모 부대에서 일병 D씨(22·남)가 목을 매 숨졌다. 군 관계자는 "그는 작년에도 죽고 싶다며 종종 나일론 끈을 들고 다녔다. 평소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있어 군 내 ‘자살방지 캠프’에서 2차례나 교육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 부대에선 한달 전 이병 E씨(22·남)가 선임병으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한 직후 목을 매달았다. 8일 다른 부대에선 하사 F씨(25·남)가 자살했다. 중사 진급이 예정됐던 그 역시 유서에서 "군 생활이 나를 힘들게 한다.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우울함’을 남겼다.
A부터 F씨까지 ‘WHO 문항’을 적용한다면 모두가 ‘심각한 우울증 환자’에 해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우울증 사망자’라고 편하고 간편하게 간주해 버리고 싶은 것D은 혹 아닐까. 우울증은 질환이다. 서글픈 심성이나 우울한 감정과는 다르다. 두뇌 신경세포 분비물 공급에 이상이 생긴 병(病)이다. 성격과 같은 유전적 요인과 함께 심각하고도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주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신과 치료는 물론 약물 치료가 가능하며, 예방도 가능하다. 결국 그것은 의학의 문제다.
우리의 심각성은 그러한 자살의 원인을 간편하게 우울증으로 덮어버리려는 편의주의적인 사고에 있다. 자살을 감행할 만큼 "…로 고민해 오고, …을 비관한다"면서도 ‘우울증 환자’가 되지 못했다면 그는 오히려 과대망상증 환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국제적 통계에 따르면 우울증 환자의 2~3%가 자살에 이른다고 한다. 비유가 조금 어색하지만, 호흡이나 심장박동의 정지가 사망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나 익사·질식에 의한 호흡정지가 없지 않겠지만, 그것은 질환 혹은 질병으로 얘기할 차원이 아니다.
우울증을 편리한대로 보편화·일반화 함으로써 자살을 너무 가까이 끌어다 놓고 있지는 않은지. 치사율 2~3%면 무서운 병은 아니다. 다만 "…로 고민하고, …을 비관하는" 서울의 시민이 많아진다는 것이 무서울 따름이다.
10일에도 사회부 데스크엔 여전히 기사가 올라 왔다.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G씨(26·남)가 목을 매 숨졌다. 가족들은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대학 편입시험을 쳤으나 낙방한 뒤 고민을 해 왔다"고 말했다.’
참, 많이, 우울하다.
정병진 부국장 겸 사회부장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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