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Weekzine Free/ 산 - 노고단에 머문 3월의 하얀 겨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Weekzine Free/ 산 - 노고단에 머문 3월의 하얀 겨울

입력
2005.03.11 00:00
0 0

참편해졌다.’ 언제나 갖는 느낌이다. 전북 남원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전남으로 넘어가는 밤재터널. 이 터널을 지나면 구례군이다. 구례군의 초입에 지리산으로 오르는 도로가 있다. 노고단(해발 1,507m)의 턱 밑인 성삼재까지 가는 861번 지방도로이다. 이 지리산 관통도로 덕분(?)에 지리산은 빨치산이 몸을 숨기던 험난한 오지가 아니라 아이의 손을 잡고 뛰놀 수 있는 놀이공원이 되어 버렸다.

노고단(老姑檀)은 ‘나이 든 시어머니’라는 이름처럼 순순히 허락되는 봉우리가 아니었다. 최고D봉인 천왕봉(1,915m)이 지리산의 바깥어른이라면 노고단은 안주인이다. 지리산 종주의 첫 관문이다. 걸어서 오르는 길은 화엄사 뒤로 나 있다. 약 4시간 땀을 뻘뻘 흘려야 한다. 노고단 봉우리 바로 아래의 마지막 코스가 인상적이다. 경사가 심해 코를 거의 땅에 붙이고 오른다. 그래서 이름이 ‘코재’다. 앞 사람의 궁둥이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궁둥이골’이라고도 불린다. 코재를 벗어나면 완만한 지리산 마루금(주능선)에 오를 수 있다. 그 곳부터 종주가 시작된다.

그러나 861번 지방도로는 많은 것을 지웠다. 도로가 난 1989년 이후 지리산 종주는 해발 1,000m가 넘는 성삼재에서 시작된다. 화엄사~노고단 코스는 산에 미친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생략한다. 그 결과 지리산 종주는 옛 명성을 많이 잃어버렸다. 속된 말로 김이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로 성삼재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지리산이다. 남한 땅덩어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북한에는 2,000m가 넘는 산이 수두룩하지만 남한에는 섬에 들어있는 한라산(1,950m)을 빼면 가장 높다. 1,500m가 넘는 봉우리만 12개이다. ‘남산(262m)도 만만치 않고 도봉산(739m)은 왜 저리 높은가’라고 생각하는 서울내기 초보 산꾼이라면 반드시 올라야 한다. 비록 자동차에 앉은 산행이지만 중간쯤 오르면 귀가 멍멍해진다. 고도를 실감한다. 성삼재에 서면 발 밑으로 구례와 하동 땅이 마치 개미마을처럼 펼쳐진다. 작은 반도에도 도전할만한 높은 산이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전투의지’를 키우는 산이다.

그리고 지리산은 넓다. 3개 도(경남, 전남, 전북) 5개 시 군, 15개 면에 걸쳐 있다. 주능선의 길이만 40km가 넘고 둘레는 320km, 넓이는 1억 3,000만 평에 달한다. 산자락이 넓어 산에 들었다가 다시 빠져나가려면 8~9시간의 산행은 기본이다. 이 땅이 손바닥만하다고? 그것은 편견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자연스럽게 우리 산과 땅에 대한 경외심을 배운다.

또 하%F나의 이유를 꼽자면 ‘길’이다. 싼 수업료(입장료 3,200원)를 내고 편안하게 높은 고갯마루까지 올랐지만 수업료가 싼 것은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나 있기 때문이다. 개발과 보존. 앞으로 산행을 하면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고민하게 될 주제이다. 지리산 관통도로 뿐 아니라 이 나라가 온 몸으로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산꾼들은 지리산 관통도로를 ‘최악의 길’이라고 한다. 산의 생태계를 망가뜨린다, 길 주변의 식생이 외래종으로 바뀐다 등등은 이미 결론이 난 주장. 산에 굴삭기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내 몸에 칼을 대는 것 같다는 사람들도 많다. 더구나 이 땅의 등줄기인 %B백두대간에. 산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저질, 추태 관광객까지 높은 곳에 올라 산의 정기를 흐린다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도로를 찬성하는 의견도 있다. ‘체력적으로 산에 오르는 데에 한계가 있는 사람은 구경도 하지 말란 말이냐’는 투정부터 ‘정해진 길이 있으니까 오히려 산 전체가 망가지지 않는다’는 제법 논리적인 주장까지 다양하다.

관통도로 산행은 성삼재에서 끝나지 않는다. 노고단까지의 맛보기 등산 코스가 있다. 성삼재에 올랐다면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약 2.8km의 이 길을 자연관찰로로 꾸며놓았다. 원래 노고단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KBS송신소를 연결하는 자동찻길이다. 왕복 2시간 정도로 가족이 함께 걷기 좋다. 주말, 특히 단풍철이면 대도시의 교통 지옥이 무색할 정도로 차와 사람이 몰린다. 평일(7일·월)인데도 삼삼오오 등산객이 보인다. 인위적으로 길 가에 만든 ‘자연’은 아직 월동 중이다. 대신 겨울의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다. 눈이 발목까지 찬다. 길은 평탄해 걷기 쉽지만 눈이 덮이면 조금 달라진다. 걸음에 힘을 줘야 한다. 30분쯤 걸으면 등에 땀이 난다. 아직 세상은 온통 하얀색. 마음까지 하얗게 된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종주코스는 지금 통행금지 중이다. 봄철 산불방지 기간인 4월 말까지이다. 반야봉으로 넘어가는 등산로 입구에 종주코스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대신 마음 속으로 각오를 다진다. ‘올해에는 이 길을 반드시 걷겠노라’고.

지리산=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