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진태옥’ 처럼 패션계에서 애증의 대상도 드물다. ‘한국 하이패션의 공과 과가 모두 진태옥에게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국내 최초의 컬렉션인 스파(SFAA)컬레션의 창립자이자 초대 회장이면서 90년대에는 파리컬렉션에 진출, 한국패션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것은 그의 공적이다. 스파컬렉션을 통해 패션문화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지만 동시에 스파의 배타성과 우월주의로 국내 패션디자이너들을 분열시켰다는 비난도 함께 받는다. 넘치는 카리스마를 앞세워 패션계 대모로 군림해온 진씨가 지난 40년 인생을 집대성한 작품집 ‘JINTEOK’을 15일 내놓는다. 200여벌의 작업이 실린 책에는 김중만 구본창 김용호 조남용 등 쟁쟁한 패션사진작가만 무려 9명이 참가했다. 현역 디자이너가 자신의 패션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작품집을 낸 것도 드문 일이지만 이 내로라하는 사진작가들을 한자리에 끌어낸 것도 간단치않은 일. 진태옥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평생의 숙제를 푼 기분"이라는 진태옥씨를 만났다.
◆ 출간 배경을 말해달라.
아르마니나 이세이미야케 베르사체 등 외국디자이너들은 누구나 한 두권씩 갖고있는 아트북이 국내엔 없다는 것이 늘 자존심이 상했다. 부럽기도 하고. 한국에도 제대로 만든 패션북 한권쯤 있어야겠다 싶었고 그렇다면 그건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 기획부터 출간까지 무려 2년 8개월이 걸렸다. 그만한 가치가 있나.
패션계 40년동안 일반상품이 아닌 패션쇼 옷은 거의 팔지않았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 창고에 남아있는 옷이 1,500벌 남짓이다. 먼지가 소복한 그 하나하나를 다시 들여다보고 만지고 가장 소중한 의미를 지닌 옷들을 추려내면서 나 자신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초보디자이너의 열정, 파리컬렉션에 진출했을 때의 오기, 한때의 자만, 또 한때의 매너리즘 등 나 자신의 모든 것이 속속들이 나오더라. ‘옷이 없으면 진태옥도 없구나’ 깨달았다. 다시 도전할 용기를 준 것이 이번 작품집의 가장 큰 성과다.
◆ 출간과 함께 전시회도 마련했는데.
압구정동 인테리어 전문점 태홈에서 24, 25일 이틀에 걸쳐 30벌 정도의 출판기념 전시회를 연다. ‘패션전시’라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디자이너가 일반인 그리고 사회와 소통한다는데 의의를 두고있다.
◆ 작품집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렵다기 보다 디자이너로서 부끄러웠다. 옷 보관상태가 엉망이었다. 공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언젠가 외국디자이너 다큐멘터리를 보니 옷 하나하나를 보석 싸듯 종이에 곱게 싸서 보관하더라. 충격이었다. 패턴을 떴던 무명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무명으로 뜬 패턴이야 말로 디자인의 기초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것이 아쉽다.
◆ 디자이너로서 역사의식이 부족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옷이라는 게 결국은 삶, 생활의 기록인데 누군가는 소중히 보관해서 후대에 남겨야하지 않겠나.
◆ 역사인식 못지않게 현실파악도 중요하다. 수입브랜드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국내 디자이너브랜드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진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대책은.
고?D민이다. 다만 위안을 삼자면 패션시장이 국제화하는 만큼 디자이너들도 경쟁력을 갖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이 시장에서 살아 남으면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디자이너로서의 퍼포먼스를 계속 보여줌으로써 고객들이 신뢰와 자긍심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작품집이나 전시회도 이런 퍼포먼스의 하나다.
◆ 패션계 40년 동안 숱한 일을 겪었을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80년대 후반 국내에서의 명성만 믿고 이민가방 한 개 가득 옷을 싸서는 무작정 뉴욕 최고 백화점인 버그돌프 굿맨 바이어를 찾아갔다. 옷은 좋다면서도 드레스 한 벌에 198불이라니까 "그냥 짐 싸서 가라"고 하더라. "니가 뭔데?"하는 식이었다. 쫓기듯 나오는데 덜덜거리는 이민가방 바퀴소리는 왜 그렇게 큰지, 분하고 초라하고. 부들부들 떨며 내 꼭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93년 가을 파리컬렉션 첫 데뷔쇼에서 기대하지않은 찬사를 얻어냈다. 바로 버그돌프 굿맨에서 연락이 오더라. 94년 그 백화점 3층 메인 쇼?%E룸에 장 폴 고티에, 이세이 미야케와 함께 내 옷이 디스플레이됐다. 그때의 흥분을 잊을 수 없다.
◆ 칠순이 넘었다. 디자이너로서의 미래는 무엇인가.
젊은 사람들 말대로 나이는 숫자일뿐이다. ‘프랑소와즈 바이 진태옥’ 외에 최근 신세계백화점 데님 편집매장 ‘스튜디오블루’를 통해 더 젊고 캐주얼한 세컨드브랜드를 출시했다. 이 브랜드들을 좀 더 젊게 혁신하고 패션전시 등 일반인들과 교류하는 기회도 더 많이 만들겠다. 옷과 도전은 내 인생의 영원한 화두다.
■ 회고 작품집 낸 디자이너 진태옥/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87년 무렵, 컬렉션이라는 것이 너무 궁금했다. 내가 일본에 가서 당시 절정기였던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매장에서 작심하고 옷을 600만 원어치 샀다. 그리곤 거의 협박조로 매장직원에서 VIP대우를 받아야겠으니 패션쇼 티켓을 달라고 했다. 딱 한 장 얻을 수 있었다. 그해 가을 스파멤버 7명과 함께 파리에 갔다. 파리 공항 근처에 거대한 천막을 치고 하는 이세이 미야케 쇼가 내가 본 최초의 파리컬렉션 무대였다.
수천 명이 들어가는 쇼장이었지만 나 외에 7명이 가진 티켓이라고는 딱 한 장 뿐이었다. 염치를 따질 새가 없었다. 한 명이 먼저 들어가서는 가방에 표를 넣어서 쇼장 천막 너머로 휙 내던지면 그걸 주워서 또 한명이 들어오고 또 던지고…. 그런 식으로 7명이 다 들어갔다.
쇼가 시작되고 첫 모델이 나오자 수백 개의 '대포(거대한 망원렌즈를 낀 카메라는 꼭 대포처럼 보였다)'들이 사각사각 셔터 돌아가는 소리를 내는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쇼가 끝나고 멤버들 모두 한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컬렉션의 장관에 취한 건지 경악한 건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마음이 천근만근 가라앉는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났다. 남녀를 불구하고 모두 울었다. 정말 꺼이꺼이 울었다. 그때 박윤수씨가 눈물범벅이 된 채 한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선생님 우리도 해요, 우리도 컬렉션 해야 해요." 그렇게 스파컬렉션이 탄생했다.
이성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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