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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진 아이들/ (上) "학교도 친구도 다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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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진 아이들/ (上) "학교도 친구도 다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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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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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생들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사교육에 몰두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공교육의 기본학습마저 따라가지 못해 결국 학교 생활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있다. 이들은 학교수업은 아예 뒷전이고 방과 후에도 거리에서 배회하며 소일하는 게 전부다. 가정에서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적절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지 못해 생긴 우리사회의 '뒤처진 아이들'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이들의 고통을 생각해보고 대안도 모색해본다.

서울 구로구의 모 초등학교 6학년 김유진(가명·12)양. 9일 오전 8시께 책가방을 들고 등교길에 나섰다. 걷는 내내 굳은 표정이었고 시선은 땅을 향해 고정돼 있었다. 잠시 후 교실에 도착한 유진이는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친구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자기 자리를 찾아 앉더니 멍하니 칠판 쪽만 응시했다.

곧 이어 담임 교사가 들어오고 첫 수업인 수학시간이 시작됐다. 학생들은 한창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유진이는 교과서를 책상 위에 꺼내 놓았을 뿐 펼치지는 않았다. 교과서 겉 표지와 앞자리 학생의 뒷 머리 부분을 번갈아 쳐다 보는 일을 반복하면서 교사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담임 교사는 유진이를 지명해 칠판에 그려놓은 그래프에서 0.003의 위치를 짚어보라고 시켰지만 "선생님 화장실 다녀올께요"라고 말한 뒤 교실 밖으로 휑하니 나가버렸다. 2교시인 국어와 3교시 사회시간도 상황은 비슷했다. 유진이는 교과서만 꺼내놓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4교시 미술 시간이 시작되자 유진이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색종이를 오리고 붙이는 데 열심이었고 선생님에게 몇 번이나 어떻게 하면 잘 하는 것인지 묻기도 했다. 곧 근사한 완성품을 선생님 앞에 자랑스레 내보이며 이날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유진이의 장래 희망은 ‘뜨개질 전문가’. 실제 십자수로 휴대폰 장식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선물하는 등 손재주가 남다르다. 또 음악과 체육에도 소질이 있으며 지능지수(IQ)도 다른 학생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극단적으로 학교 다니기가 싫다. 학생들과 어울리기도 싫고 수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러다 보니 학력수준은 1~2학년 정도이다. 덧셈 뺄셈 등은 잘 하지만 곱셈의 경우 단위가 커지면 쉽게 풀지 못한다.

담임인 이모(43·여) 교사는 "지난해만 해도 학력이 뒤 처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을 실시해 유진이 실력이 조금 향상되는 듯 했으나 올해부터 시행되지 않아 더욱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고 있다"고 걱정했다.

유진이는 할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데 보일러공인 아버지는 수입이 넉넉지 못해 늘 일거리를 찾느라 유진이를 돌볼 틈이 없고 할머니도 골다공증 등 지병을 앓고 있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거의 혼자 지내다시피 한다.

오후 2시30분께 학교가 끝나자 유진이는 인근 교회가 운영하는 공부방으로 갔다. 공부방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일종의 대안학교. 1곳당 20~100명이 배우고 있으며 전국 350여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공부방에 들어서자 유진이의 표정부터 달라졌다. 8명 정도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더니 나이 어린 학생들이 들어오자 "아이고 예쁘네"라며 연신 등을 토닥거린다. 이 공부방에서 유진이는 음악과 미술 시간이 되자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공부방 박모(34) 교사는 "유진이는 미술과 음악에는 상당한 소질이 있는데 학교에서는 이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사람이 없어 더욱 적응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유진이는 "할머니와 아버지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지만 재미도 없는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학교 친구들과 사귀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라며 "공부방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만 하루종일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은 7일 시내 3~6학년 초등학생 중 한글 읽기와 쓰기, 셈 등을 제대로 못하는 학생이 1만4,421명이라고 밝혔다. 유진이처럼 가정환경 등의 이유로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학습부진아들이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 이 학교 김모(60) 교감은 "가정에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학생에게 학교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실상 아무 것도 없다"며 "맞춤식 수업만 한다면 훌륭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도 있는 데 국가적 관심부족이 유진이 같은 아이들을 점점 구석으로 내몰고 있다"고 말했다.

신기해기자 shinkh@hk.co.kr

김광수기자 roll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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