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정환(51)의 산문은 넌지시 시적이다. 이것이 그의 산문에 대한 찬사인지는 확실치 않다.
산문가 김정환의 시는 슬그머니 산문적이다. 이것 역시 그의 시에 대한 찬사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김정환은 가장 반듯한 산문을 쓰는 시인이자, 가장 산뜻한 시를 쓰는 산문가다. 이것은 찬사다.
김정환의 시가 산문적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산문시라는 뜻이 아니다. 김정환은 좀처럼 산문시를 쓰지 않는다. 불혹을 넘기고 낸 시집 '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1994년)이나 '텅 빈 극장'(1995년)에서는, 섬세하게 연산된 율격으로 시의 음악화를 꾀한 전과(前過)까지 있다. 그러나 입에 척 들러붙었던 소월의 ‘진달래꽃’에 바로 이어 김정환의 첫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1982년)를 읽을 때, 시적인 것에서 산문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체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진달래꽃’에서 바깥으로 툭 불거져있던 리듬은 ‘지울 수 없는 노래’에선 속으로 푹 가라앉아 있다. 무엇보다도, ‘지울 수 없는 노래’의 노래들은 산문의 견고한 통사 기율을 준수한다. 김정환의 글쓰기에서, 시의 문법과 산문의 문법은 동일F한 교본에 터잡고 있다. 그의 산문정신은, 곧 그의 지성은 시적 허용의 남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재능에도 그 갈래별로 위계가 있다면, 문학적 재능은 음악적 재능에 견주어 하찮은 것임에 틀림없다. 글재주는 어느 정도 다듬어지고 벼려지는 것이지만, 가락을 만드는 재주는 태어난다고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1970년대 대중문학은 그 시대에 신중현이나 이장희가 대중음악에서 보여준 경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1970~80년대 민중문학도 김민기나 문승현이 민중가요에서 보여준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음악과 문학의 이 거친 대비를 문학 내부로 가져와, 시와 산문의 대비에 포갤 수도 있을 것이다. 산문가는 훈련되는 것이지만,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다. 천재 음악가가 가능하듯 천재 시인은 가능하지만, 천재 산문가는 불가능하다. 시인이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다는 것은 시가 귀족의 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산문가는 태어난다기보다 벼려진다. 벼림은 귀족의 일이 아니라 평민의 일이다. 그래서 산문은, 바로 그 이름이 가리키듯, 흩어진 글, 볼품 없는 글이고 평민의 글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주의 소월은 천재였고 귀족이었다. 그러면 김정환은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적어도 그는 소월을 귀족이나 천재라고 부를 때의 그런 천재나 귀족은 아니다. 고전음악에 대한 조예가 김정환만 한 이를 한국 문단에서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를 귀족이나 천재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음악은 재능이라기보다 교양인 듯하기 때문이다. 그의 눈부시게 아름답고 열정적인 문장도,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는 벼림의 소산이다. 그런데 천재란 벼림 없이 드러나는 재능이고, 귀족이란 오직 출생으로 얻게 되는 신분이다.
무엇보다도, 시든 산문이든 김정환의 글을 읽노라면, 그가 예술가인 것 못지않게 지식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식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E지는 것이다. 김정환의 글은 유물론의 바다를 헤엄치며 육체의 구체성을 구가하는 것 못지않게 관념과 놀아나는 지적 체조에 탐닉한다. ‘지울 수 없는 노래’에서도 더러 관념이 날아다닌다. 소월이라면, 그가 50년쯤 뒤에 태어났더라도, ‘처절한 근본적 참여’(‘빈대 걸음마’)라거나 ‘눈부신 단순성’(‘동계훈련’)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관념?0? 표현들은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에서 대체로 성공적이다. 그 관념들은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시 읽기의 자동화를 막는다.
‘진달래꽃’의 세계가 밀실이라면, ‘지울 수 없는 노래’의 세계는 광장이다. ‘지울 수 없는 노래’에는, 유신체제 출범과 함께 성년에 도달하고 광주학살의 충격에 휘둘리며 사회에 나온 젊은 지식인 예술가의 미적-윤리적 결단이 도사리고 있다. 이 시집은 김정환 문학의 출발점이면서 테두리다. ‘지울 수 없는 노래’에도 ‘진달래꽃’ 만큼이나 설움과 그리움이 넘쳐 난다. 그러나 ‘진달래꽃’의 설움과 그리움이 사사로운 것이었다면, ‘지울 수 없는 노래’의 설움과 그리움은 도드라지게 공동체적인 것이다. 그래서 "설움이 모여서 사랑이 될"(‘타는 봄날에’) 때 그 사랑도 공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울 수 없는 노래’도, ‘진달래꽃’처럼, 한국 민족과 민중에 굳게 결합돼 있다. 그러나 ‘진달래꽃’이 그 결합을 언어 형식의 수준에서 이뤄냈다면, ‘지울 수 없는 노래’는 그 결합을 언어 내용의 수준, 곧 이념의 수준에서 실천하고 있다. 김정환은 "더러워서 아름다운 조국의 땅더미"(‘이태원에서’)에 발을 디딘 채 억새 같은 민중의 생명력을 노래했다. 그 해석을 두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김수영의 ‘풀’과 달리, 김정환의 억새는 질긴 생명력의 민중에 대한 은유로 튼튼하다.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 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 같이 빨려 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마포, 강변 동네에서’).
그는 시대의 무당이었다. 개죽음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서 살아남은 이 젊은 무당은 "그대가 나의 미망(未亡)의 눈앞에 펼쳐논 온통 샛노란 불볕, 벌판"(‘유채꽃밭’)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렇게 살아남은 것"을 "못내 부끄러워"(‘길잃기’)하지만, "남아서 못8난 사람들끼리/ 살아서 장한 사람들끼리/ 사랑하고, 꾀죄죄한 살 비비"(‘초복’)기를 기원한다. 싸우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반짝이는 것은 비참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을/ 목숨은 어떤 비참보다도 끈질기다는 것을"(‘성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를 이끄는 감수성은 희망의 원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육교를 건너며’의 화자는 "나는 오늘도, 이렇게 저질러진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고 털어놓은 뒤 "나의 지치고 보잘것없는 이 발걸음들이/ 끝남으로, 완성될 때까지/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희망의 원리’라는 표현을 유명하게 만든 에른스트 블로흐는 유토피아는 인간의식의 본질에 속한다고, 인간은 자신을 미래에 투사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지울 수 없는 노래’의 시들은 희망의 원리를 떠받치는 이 유토피아적 이성의 정서적 등가물들이다. 김정환의 희망의 원리는 혹독한 80년대를 거치며 민중민주주의 변혁론과 버무려져 ‘기차에 대하여’(1990년)나 ‘사랑, 피티’(1991년) 같은 시집을 낳았다. 이 시집들의 가쁜 숨결이 설령 현실을 비껴갔다고 하더라도, 80년대의 맥락 속에서 그것이, 그것만이 윤리적이었다는 사실은 오롯이 남는다. "소스라쳐 내가 놀라는 것은/ 아직도 내게 돌려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소름끼치는/ 동산 부동산"(‘바퀴벌레’)이라거나 "나의 전신을 수도 없이 강타하는 것은/ 실상은 부드러운 그의 말씨이다/ 그가 하는 말 중에 민주라거나 투쟁이라거나/ 민중이라거나 자유라거나/ 이런 문자 그대로 황홀한 말들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내 몸은 수없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더욱 욱신욱신 쑤시는 것일까"(‘이씨’)라고 반성할 줄 아는 염결한 정신이 혁명행 열차에 탑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울 수 없는 노래’는 뛰어난 시집이다. ‘성탄’이나 ‘봄길’을 비롯해, 적어도 이 시집의 전반부에 실린 작품들은 당대 한국 시문학이 목격한 미적 긴장과 생동의 정점에 자리잡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시집을 떠받치는 것이 생명력이나 부끄러움만이 아니라 일종의 탐미 취향이라는 것도 지적해야겠다. 김정환을 탐미주의자랄 수는 없겠지만, 그의 화려하고 힘찬 말투는 드물지 않게, 의뭉스럽게, 탐미를 수행한다. 탐미가 데카당스나 요사스러움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지울 수 없는 노래’의 탐미가 바로 그런 드문 예라는 것도 지적해야겠다.
‘지울 수 없는 노래’를 상재했을 때, 시인은 이미 옥살이와 강제징집으로 시대의 소명에 응답한 상태였다. 이 시집을 낸 뒤 80년대를 거치면서도 그는 자주 신체의 자유를 군사정권에 압수당했다. 그가 시대의 어둠에 정면으로 맞선 윤리적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예술에 덤의 값어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노래’ 앞뒤의 시인 개인사를 염두에 두고 이 시집을 읽을 때, 활자들이 독자의 가슴에 더 깊이 박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지울 수 없는 노래
불현듯, 미친 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부활이라고 했다
불러도 외쳐 불러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 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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