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문사회연구회 연구진은 자연, 인문, 사회과학으로 구분 짓는 이른바 '과학의 3분리 모델'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분야가 서로 담을 쌓고 지내는 바람에 "수많은 정보들만 바다를 이뤄 흘러갈 뿐 지식으로 재가공되지 못한 채 폐기되고, 구체적 현실분석에서 출발하지 않은 탓에 사회적 복잡성의 증대에 대처능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지적이다. 그런 분리주의는 사회과학 내에서도 작동하는데, 가장 심각한 것이 정치·경제 분리주의다. 미래학읽? 앨빈 토플러는 1990년 출간한 ‘권력이동’에서 이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미국 대학의 대표적인 경제학 교과서인 새뮤얼슨과 노드하우스의 ‘경제학’ 책에 28쪽에 이르는 긴 색인이 실려 있지만, 이 색인을 아무리 찾아 봐도 ‘권력’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걸 개탄했다. 도대체 권력을 언급하지 않고 무슨 경제학을 논하느냐는 것이다. 토플러의 비판은 경제학자들에게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정치학자들에게 왜 경제를 외면하느냐고 비판해도 같은 대접을 받을 게 틀림없다. 정치와 경제는 한 침대를 쓰던 부부였지만 이젠 이혼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도 그런 분리주의 모델에 충실하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전공이 오직 정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경제는 정치 비용을 조달하는 동네 쯤으로 간주한다. 국가경제는 경제 전문가를 참모로 쓰면 된다는 생각이다. 조금 깨인 정치인은 뒤늦게 경제학을 공부해보겠다고 나서지만 겨우 학부 수준의 교과서를 붙들고 씨름하기에 바쁘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발생한다. 권력을 잡은 정치인들은 모든 개혁 의제를 정치에 집중시킨다. 그게 유일한 전공 분야이며, 자신을 이전 권력과 차별화하는 유일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경제에 대해선 ‘정경유착 타파’가 유일한 개혁의제다.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치면 그들은 정치적 개혁을 좌절 시키려는 음모라고 일축한다. 경제 위기가 반박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나면 그때서야 신경을 써보려고 하지만 경제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래서 모든 걸 경제전문가에게 의존한다. 그래서 또 경제는 ‘탈(脫)이념의 영역’으로 간주되고, 평등주의 기질은 정의적(情意的) 수준에 머무른다.
시민사회 영역도 같다. ‘정치과잉, 경제과소’다. 참여적 시민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건 주로 정치적 이슈다. 이들 역시 자신들이 잘 아는 ‘전공’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극심한 빈부격차를 불러오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노는 높지만 각론도 없고 단계별 대안 제시도 없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는 모든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관심사지만, 구체적 경제정책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정치 밖에 방치돼 있다. 이 또한 정치와 경제의 ‘이혼’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경제를 살려야 박정희가 죽는다"는 말까지 나온다. 경제를 물신화시켜 정치개혁을 방해하려는 책동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 개혁의 물신화도 경계 대상이다. 정치와 경제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으로서의 원래 위치를 찾아야 한다.
학계에서의 정치·경제 분리주의는 무슨 거대한 음모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처음의 문제의식은 학문적 절제와 분업의 효율성이었다. 한 우물을 깊게 파는 연구자는 필요하지만 모든 연구자들이 다 그럴 필요는 없다. 정치, 경제학을 하나로 묶어 다루는 연구자들도 필요하다.
정치에 대해선 독선과 오만을 범할 정도로 자신만만하다가도 경제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정치인들로 21세기의 민생을 돌보긴 어렵다. 정치와 경제의 재혼이 시급하다. 한국사회가 겉으론 ‘정치 우위’인 것 같지만 실은 경제가 모든 걸 지배하는 구조의 독재 하에 놓여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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