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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1) 장회익 한성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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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1) 장회익 한성학원 이사장

입력
2005.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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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직장에서 물러난 후 누리게 되는 한가지 이점은 내가 살아갈 집을 내 마음대로 원하는 위치에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도 요즈음 앞으로 살아갈 집을 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다. 즉, 걸어 갈만한 위치에 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유명한 등산가는 왜 산을 오르는가 하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어서"라고 대답을 했다지만, 나는 산이 거기 없으면 산을 찾아내서라도 올라가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다고 매번 남의 발(교통수단)을 빌려 찾아 나%설 수도 없으니, 내가 산 가까이로 가는 도리밖에 없다.

또 한가지 조건이 있는데, 집이 충분히 커야 한다는 것이다. 큰 집 싫어할 사람이야 없겠지마는 내게는 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책을 정리해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주변에서는 자꾸 책 좀 버리라고 하지만, 나는 내 책들을 버릴 수가 없다. 아직 내 공부가 덜 끝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큰 집으로만 갈 수도 없는 일. 그러다가 한가지 묘책을 찾아냈다. 주변에 도서관이 있는 곳으로 가자는 것이다. 집에 보관하기 어려운 책은 도서관에 기증해두고 볼 수도 있겠고, 또 필요한 새 책은 도서관에 부탁해 사도록 할 수도 있으니 비용마저 절감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한동안 바빴다. 다른 몇몇 조건들도 있지마는, 특히 이 두 가지를 만족하는 위치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내기는 했으나 여기서 굳이 어디라고까지 밝힐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런 일에 관심 가질 독자는 별로 없을 테니까. 그것보다는 오히려, 왜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공부를 한다고 그렇게 소란을 떠는지 궁금해 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쉽지 않다. 이제야말로 아무도 내가 공부 안 한다고 꾸짖을 사람이 없다. 공부 안 하는 학생, 공부 안 하는 교수야 당연히 지탄의 대상이 되겠지만, 공부 안 하는 노인을 누가 탓하랴. 그래도 만일 나보고 더 이상 책을 읽지 말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사형선고만큼이나 두려워할 것이다. 술꾼에게 술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비유가 될까?

오히려 이야기를 거꾸로 돌려보는 게 좋겠다. 나는 왜 공부꾼이 되었나? 아마도 성장 과정에서 재미를 그 쪽으로 돌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달리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많이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공부에 지치지 않을 만큼만 재미로 공부했다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술꾼이 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술을 잘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특히 술은 어른 앞에서 배우는 게 좋다고 한다. 나 또한 공부를 즐기는 것은,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공부를 잘 배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배려해 주신 부모님의 은덕이 크다. 사실 내 선친은 공부에 관한 한 자못 도사의 경지에 머물렀던 분이다. 그 분은 책을 읽다가도 특히 재미있는 부분을 만나면 더 이상 읽지 않고 덮어두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야 다음에 다시 그 책을 찾게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당장 재미있다고 해서 몸이 지치도록 읽고 나면, 그 때는 미처 못 느끼지만 이 피로의 느낌이 몸 속에 각%인되어 다시 책을 펴보기 싫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내게도 지치도록 공부하게 두지 않고 오로지 재미로만 공부하게 배려해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어쨌든 나는 덕분에 공부에 재미를 붙였고, 이것은 정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보기에 따라 이것이 썩 좋은 취미가 되지 못한다. 어떻게 인생에 있어서 공부말고 더 좋은 취미가 없겠는가? 어떻게 일생동안 그 고통스런 공부에 매여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는가? 아마도 나는 다른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별로 아쉬울 것이 없다. 그저 내 하고싶은 대로만 할 뿐이다.

주위에서는 내 이 취미가 건강을 헤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우에 가까운 일이다. 가까이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 그렇겠지만 공부를 그리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마쳐야 할 글들을 빨리 마치지 못해 애를 태우면서도, 몸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내 몸은 말하자면 제 편한 대로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 생긴 취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독서 못지 않게 산책이나 등산을 즐긴다. 그러니까 공부에 지치기 훨씬 전에 내 몸은 이미 산책로를 걷고 있거나 작은 야산 위에 올라가고 있다. 나는 결코 몸도 마음도 혹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몸의 건강도 마음의 건강도 크게 상하는 일은 없다. 그러다가 보니 나는 능률적인 인간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종종 시간에 쫓기는 일은 있지만, 시간이 남아돌아 심심하다거나 시간이 안 가서 지겹게 느끼는 일은 없다. 오히려 하고싶은 일은 더 많은데 시간의 부족으로 못한다는 아쉬움을 항상 지니고 산다.

이것이 아마 내가 운전을 하기보다 대중 교통을 더 즐기는 한 원인이 될 것이다. 운전을 하게 되면 내가 책을 읽거나 깊은 사색에 빠져들 여유가 없다. 그렇지만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는 이 시간을 내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가 있다. 평소 읽고싶어도 시간 관계로 읽지 못하던 책들을 나는 이 시간에 읽는다. 책이 옆에 있으면 장거리 여행조차 부담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이다.

정규 직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누리는 또 한 가지 특권은 공부하는 주제에 대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의무적으로 공부E하는 것과 자진해서 공부하는 것 사이에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는 공부의 주제를 자유롭게 채택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공부에는 주제가 없을 수 없지만, 일단 주제에 제약을 받게 되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창의적인 공부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자기의 생각을 좇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불가피하게 어느 한 쪽으로 몰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에 고통이다. 그런데 나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무엇이나 떠올리는 것이 다 공부는 아니다. 자기 생각의 줄기가 있기 마련이며, 이를 깊이 있게 파헤쳐 나갈 떄라야 중요한 열매가 손에 잡힌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생각을 이어나가되 일관된 방향이나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바탕으로 어떠한 방향의 공부를 지향하는가? 나는 결국 지금까지 해 온 내 학문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물리학에서 출발을 했고 철학을 거쳐 이제 생명을 이해하는 길에 들어서고 있다. 물리학과 철학의 결합 속에서 나는 양자역학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의 의미를 나름대로 파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생명을 이해하려 노력한 결과 얻어낸 새로운 개념이 바로 ‘온생명’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이 모두를 통합하여 내 삶의 참 의미를 찾아보자는 것이 바로 내가 지향하는 바이다.

일찍이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을 했다. 나 또한 이를 목표로 생애를 걸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깨달음을 깨달음으로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조차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 나를 있게 해준 우리 모두의 것이며 그렇기에 우리 모두의 것으로 남겨져야 한다. 깨달음을 얻은 나는 당연히 또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위해 말로 또는 글로 그 무엇을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혼자 깨달아 그것을 무덤으로 가져간다면 중요한 그 무엇을 훔치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나는 공자의 말씀을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아침에 깨닫고 낮에 이를 글로 적어놓았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그런데 아침에 깨닫지 못했거나 깨달았다 하더라도 글로 써놓지 못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다음 날까지 하루를 더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안되면? 또 하루를 더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하루하루 더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편히 죽는 날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부하는 하루 하루가 즐겁다는 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장회익 이사장은…

1938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장회익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이다.

물리학에서 출발한 그의 학문은 과학의 구조 연구로 철학에 접근했으며 최근 들어서는 지구의 생명계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온생명론을 통해 생태철학의 새로운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다. 저서로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등이 있다.

김주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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