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한 정치인으로부터 메모를 받았다. 그 메모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각하는 북한 핵 문제의 해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 정치인은 "동교동에 인사 갔더니 김 전 대통령이 북한 핵 문제를 걱정하면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얘기했다. 그 양반 말씀을 받아 적었더니 ‘정 장관에게 전하라’고 하더라" 고 말했다. 정 장관은 이 메모를 꼼꼼히 읽었다. 김 전 대통령과 정 장관은 이처럼 북한 핵 문제와 남북관계를 놓고 대화를 하고 있다. 간접 대화만 하는 게 아니다. 정 장관이 두 달에 한 번 정도 동교동을 방문, 김 전 대통령의 조언을 구하고 한 두 시간씩 토론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 말에 이어 10여일 전에도 그랬다. 정 장관은 김 전 대통령을 만날 때면 항상 수첩을 꺼낸다. 북한의 의도에서부터 미국의 전략, 6자 회담, 중국의 역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부시 미 대통령의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제들을 김 전 대통령의 경험과 지혜를 통해 섭렵하기 위해서다. ‘4대2냐, 1대5냐’는 대북 설득논리도 김 전 대통령을 통해 얻었다. 북한이 6자 회담에 나오면 한국 중국 러시아가 역성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지만, 아예 회담에 나오지 않으면 북한을 제외한 5개국 모두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 장관은 임동원 박재규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도 매달 한 번씩 저녁 식사에 초대, 조언을 구하고 있다. 현직 장관이 전직 대통령과 전임 장관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 받는 그림은 아름답다. 더욱이 김 전 대통령과 정 장관의 만남은 정치적 화해라는 뉘앙스도 담고 있어 더 그렇다. 사실 김 전 대통령은 정 장관에게 서운한 감정이 없지 않다. 김 전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2000년 말 민주당 최고위원이던 정 장관이 면전에서 쇄신을 요구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이 공천을 줘서 정계에 입문시켰고 대변인으로 임명, 스타덤에 오르게 했다고 생각했기에 정 장관의 쇄신론은 충정이 아닌 배덕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 그런 김 전 대통령이 지난해 정 장관이 부임 인사차 방문했을 때 "정말 잘 해야 한다" 고 격려했다. "공천을 준 게 엊그제 같은데 대견하다" 는 언급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쇄신 파동을 화제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사소한 일이 돼있었다.
그 날 이후 정 장관은 동교동을 자주 찾고 있다. 민족생존 문제 앞에서 정치권의 얽히고 설킨 인연이나 악연은 사사로운 법…, 그래서 두 사람의 만남은 즐거운 소묘(素描)다.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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