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 직전 한나라당은 예상밖의 비례대표 공천을 단행했다. 관습이나 다름없던 사무처 당료 배려, 호남배려 관행을 모조리 깨버린 것. 당시 공천심사를 맡았던 박세일 선대위원장은‘전문성’이란 명분을 내세워 친분있는 교수, 명망가들을 대거 선순위로 공천했다. "당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란 불만이 당료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음은 물론이다.
새삼 당시를 들먹이는 것은 공천과정을 시비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의원직의 신성함과 엄중함 때문이다.
행정도시법 처리를 앞두고 박세일 의원 등 한나라당 비례대표 몇 명이 법 통과시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결의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의원직의 엄중함을 간과한 경솔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김무성 사무총장의 말대로 "애당충정으로 고생한 당료, 호남에서 고생한 당원들에게 피눈물을 쏟게 하고"쉽게 주운 금배지라 그런 것일까.
사퇴를 공언했던 한 의원은 4일 약속 불이행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비례대표는 1인2표로 국민들께서 뽑아주신 귀한 자리"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그는 당선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자괴감이 들어 그만 둘 것을 심각히 고민중이다"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한 장본인이다. 늘 사퇴를 입에 달고 다녔던 사람으로서 지금에서야 ‘귀한 자리’운운하는 모양새가 우습다. 지금이라도 금배지의 무게에 부응하는 길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박세일 의원은 4일 실제로 국회 의장에게 사퇴서를 냈다. 그런데 나머지 의원들은 아직 의사표명을 안하고 있다.
아울러 소신과 당론이 다르다면 사퇴 운운하며 시간을 끌 게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탈당하는 게 도리다. 비례대표의 경우 탈당하면 당연히 의원직도 그만 둬야 하기때문이다.
이동훈 정치부 기자 dhlee@hk.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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