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김지수(34)가 ‘여자, 정혜’(10일 개봉)로 처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의외다. 1992년 SBS 드라마 ‘여형사 8080’으로 데뷔한 지 13년. 그의 인기와 연기 이력 정도면, 눈에 띄는 영화가 아닐지라도 적어도 두세 편 정도는 프로필에 포함 될 만도 한데 말이다.
"영화와는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았어요. 아무 작품이나 하고 싶지 않았죠.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보다 어떤 영화를 하느냐가 중요하니까요."
그가 뒤늦게 브라운관을 벗어난 ‘여자 정혜’는 ‘그렇고 그런’ 범작은 아니다. 그렇다고 요란한 블록버스터도 아니다. 일상의 무게를 덜기 위해 떠난 여행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지만 포근한 숲 같은 작품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 아시아 신인 작가상을 받았으며, 지난달 열린 베를린영화제에서 영포럼 부문 넷팩상을 수상했다. 카메라를 들고 찍어 주인공을 좇으며 흔들리는 감정을 세밀하게 포착해내는 연출력이 인상적이다.
"100% 만족할 수는 없지만 첫 영화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나리오를 본 순간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그가 연기한 정혜는 불행에 불행을 거듭하며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자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우체국에 근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아픈 과거를 지우기 위해 조용히 몸부림 친다. 그러나 그의 몸짓은 사회성 결여로 비쳐져 주위 사람을 당혹스럽게 할 뿐이다.
"처음에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러나 연기를 하면서 ‘정혜가 비정상이 아니구나, 어느 누구와도 비슷한, 그러나 표현 방법이 다른 여자구나’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정혜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그녀가 조금 더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람을 대하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화장기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커다란 스크린에 드러낸다는 것이 부담스러울만도 한데 "예쁘게 나오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손짓 눈빛 고갯짓 등 작은 움직임으로 감정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었다고 한다. 남자인 이윤기 감독은 ‘여자’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김지수는 ‘정혜’를 올바로 알기 위해서 촬영기간 내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 ‘여자들은 이렇지 않나요’ 하며 수정한 부분도 몇 곳 있지만, 감독님이 워낙 섬세하셔서 별 어려움 없이 촬영을 마쳤습니다."
김지수는 영화배우라는 직함이 아직 낯설다고 한다. 영화에 대한 거창한 포부나 계획도 없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저 비중과 상관없이 좋은 작품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쉽게 영화를 선택하면 그만큼 자신을 깎아 내리는 것이기에 한동안은 신중해야겠다"고도 말한다.
그가 섣불리 영화를 고르지 못하는 이유는 "대한민국 여자 배우로서의 서글픔" 때문이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자배우는 예쁘고 젊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안타깝고 속상하고 답답해요." 여자 캐릭터들이 너무 전형적인 것에 대한 불만이다. "가볍거나 코믹하지 않은 여자 ‘양아치’ 역을 해보고 싶어요. 한석규 선배가 연기한 ‘넘버 3’의 태주나 ‘그때 그 사람들’의 주과장 같은 역에 마음이 끌려요." 그래서 영화배우로서 김지수는 화려함보다는 나이에 얽매이지 않는 연기 생활을 꿈꾼다. "메릴 스트립, 수잔 서랜든처럼 배우로서 어떻게 잘 늙을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나이 들어서도 보기 좋은 배우는 흔치 않지만 그렇게 되고 싶어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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