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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석의 TV홀릭] 눈녹듯 사라진 ‘봄날’의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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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석의 TV홀릭] 눈녹듯 사라진 ‘봄날’의 설렘

입력
200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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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봄날’에서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방법은 동일하다. 그들은 모두 마음 속에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치료해주는 사람을 사랑한다. 정은(고현정)은 꾹 다문 자신의 입을 열게 한 은호(지진희)를 사랑하고, 은섭(조인성)은 피만 보면 구역질하는 ‘찌질이’였던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도록 이끈 정은을 사랑한다.

‘봄날’에서 사랑이란 상처의 치유와, 그로 인한 변화의 과정이다.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한 사람들은 타인과 소통하고, 다른 사람의 상처도 보듬어 준다. 그러나 그들이 타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순간, 상대방의 사랑이 시작되고, 그래서 사랑은 계속 엇갈린다. 나는 사랑 때문에 이렇게 변했는데, 정작 날 변하게 한 사람은 다른 이를 바라본다.

철없던 ‘찌질이’가 어느덧 인생의 고통을 알게 되는 과정은, 결국 우리가 사랑을 하며 성숙해가는 그 과정이다. 그래서 ‘봄날’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찌른다. 굳이 ‘고현정 효과’를 거론하지 않아도, ‘봄날’은 사랑이 마음을 움직이고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과정’을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충분히 공감과 감동을 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봄날’은 그 변화의 과정을 느긋하게 즐기지 못한 채 외적인 상처, 즉 자극적인 사건을 만들어냄으로써 길을 잃고 말았다.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관계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나름의 선택을 내리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려 하지만, 경아(이소연)의 빚을 핑계로 등장한 조폭이나, 은섭에 대한 집착으로 그의 어머니(이휘향)가 일으키는 극단적 행동들은 계속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특히 민정(한고은)이 정은의 조건을 들먹이며 물러날 것을 요구, 기어이 정은이 은호에게 결별을 선언하게 한 것은 이 드라마를 악녀가 모든 것을 망치는 진부한 트렌디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 사이 어엿한 의사로 성장해가던 은섭이나, 입을 열면서 적극적으로 변한 정은의 새로운 모습은 점점 사라진다. 그래서 오랜만에 복귀한 고현정이나, 더 발전할 가능성을 지닌 조인성은 깊은 내면 연기를 보여줄 기회를 잃는다.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을 이야기하던 드라마가 상처를 치유한 후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누가 누구와 맺어지느냐’에만 머물러있는 것이다. 여전히 사랑에 대해 절절한 감정을 쏟아내는 그들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순간적인 공감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드라마의 원래 설정이 품고 있었던 캐릭터의 섬세한 감정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검증된 원작과 호화 캐스팅을 자랑한 ‘봄날'이 초반의 폭발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변화없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제작진은 빠른 스토리 전개나 자극적인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드라마 고유의 정서나 그 느낌이라는 것을 잠시 잊은 듯하다. 살얼음이 녹듯, 서서히 따뜻하게 다가오는 ‘봄날’의 느낌 말이다.

대중문화평론가 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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