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ㆍ차관이 새로 임명되면 언론들은 그의 주요 이력을 자세하게 보도한다. 그리고 대표적인 이력 하나가 그 사람을 정의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군수 출신 장관, 대기업 사장 출신 시장,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같은 표현이 그 예이다.
최문순 MBC 신임사장에 대한 정의는 단연 '노조위원장 출신'이다. 노조위원장이라는 단어는 대개 파업이나 투쟁, 그리고 붉은 머리띠를 연상시킨다. 양복 입고 카메라 앞에서 보도하는 방송기자와는 딴판 이미지이다. 하긴 양복과 넥타이가 블루칼라에 대한 차별적 기능을 해오면서 격식과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듯이 노조의 점퍼와 붉은 띠는 애초부터 양복과는 정 반대의 상징을 의도한 것이지만. 그러니 보도제작국 부장 출신인 최문순 사장은 양복 대신 점퍼, 넥타이 대신 붉은 머리띠로 상징화된 것이다.
최 사장에 대한 언론의 정의가 영 잘못되었다거나 부당한 것은 아니다. 노조위원장으로서의 활동이나 역량이 사장 선임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조위원장 출신이라는 사실에 집착해서 "노조 편향과 진보적 성향에 대한 일각의 우려…"라고 걱정하는 일부 신문의 자세는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사장 공모 과정에서 최 사장이 발표한 프리젠테이션 내용을 꼼꼼하게 분석하는 편이 MBC의 미래를 그려보는 데에 더 유용하지 않았을까.
최 사장 프리젠테이션 내용의 핵심 중 하나인 조직 개편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임원 및 국장급 인사가 발표되었다. EBS 사장 임기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사임한 후 MBC 사장 공모에 응해서 비판을 받았던 고석만 전 사장이 TV제작본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일부 부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인사에 대한 사내외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1980년대에 입사한 인력들이 국장급 간부로 발탁되어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는 해석과 능력 우선의 조직 분위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지배적이다. 붉은 머리띠를 연상케 하는 의사결정은 분명 아니다.
MBC의 오늘은 상당히 우울한 게 사실이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라고까지 평가된다. 그 와중에 새로운 선장이 된 최 사장의 임무는 노조위원장의 그것에 비할 바 아니다. 자꾸 노조위원장 출신임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개인적 역량에 대한 평가절하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첫 인사에 대해 ‘노조스럽다’는 평가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행이고, 또 고무적이다.
아무리 다매체 시대라 하더라도, 지상파 방송 4사의 역할과 비중은 여전히 막중하다. MBC가 잘 되기를 바라는 심정도 결국은 한국 방송계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현재 MBC 보도 프로그램의 상품성과 신뢰도는 거의 바닥 수준이고, 드라마의 지지부진은 이제 일시적 슬럼프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최근의 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다모’와 ‘대장금’이 당시 간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 인력구조를 강하게 비판한 최 사장의 취임사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으리라.
한 인터뷰에서, 최 사장은 "창피한 이야기지만"이라며 KBS의 조직구조를 모방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는 KBS의 구조 개편으로부터 절반의 실패까지 모방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점퍼를 입든 양복을 입든, 최문순 신임 사장은 잠자던 공룡을 깨워서 뛰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은 ‘노조위원장 출신’이라는 라벨을 벗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방송계의 혁신과 발전을 위해서이다.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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