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후소(繪事後素)’ 그림을 그리기 전에 마음 바탕이 제대로 돼야 한다는 이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월전 장우성은 운보 김기창과 더불어 한국화단을 이끈 중추였다. 월전은 특히 정통 문인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마지막 문인화가’였다.
월전은 불과 1년 여 전까지도 신작을 선보이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지 않았다. 1998년 미수(米壽)전, 2001년에 구순전을 열고, 2003년에도 자신의 화업을 정리한 회고록 ‘화단풍상 70년’을 집필하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의‘한중대가’전을 준비하는 등 왕성하게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결국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지난해 여름 쓰러졌고, 이후 월전미술관의 경기 이천시 이전 문제와 친일 작가 논란이 불거지며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12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난 월전은 30년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서 운보와 나란히 수학하며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41년 ‘푸른 전복(戰服)’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鮮展)에서 총독상을 받은 뒤 3년을 내리 입선했고, 44년에는 화가로서 최고 영예인 추천작가가 돼 일찍이 한국화단의 대표적 인물화가로 입지를 굳혔다.
월전의 70여년 화업 중에서도 주목할 부분은 광복 이후. 이때부터 사실적 시각에 바탕해 치밀히 묘사하는 스승 이당의 그늘에서 벗어나 문인화로 방향을 틀며 한국화단에 참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림에 앞서 한학을 공부해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월전은 평생에 걸쳐 ‘문인화의 현대적 변용’을 고민하며 추상이 곁들여진 힘차고 분방한 붓 놀림으로 활달한 화면을 추구해 나갔다. 80년대에는 공해, 남북분단 등 현실 문제도 끌어들여 문인화의 고답스러운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도 했다.
그는 46년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를 시작으로 71년부터 5년 간 홍익대 교수로서 재직하는 등 후학 육성에도 힘을 기울이며 화단을 이끌었다. 제자들이 주축이 돼 설립한 월전미술문화재단은 그의 업적을 기려 91년 서울 팔판동에 월전미술관을 개관했다. 예술원 회원으로 71년 예술원상과 72년 5·16민족상을 수상했고, 문화훈장 은관장,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월전은 ‘강감찬 장군 영정’(낙성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현충사) ‘백두산 천지도’(국회의사당) ‘유관순 열사 영정’(유관순기념관) 등 동양화가 중 공공미술품을 가장 많이 제작한 화가로도 꼽힌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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