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 어느 날. 서울의 한 외국계 은행에 말쑥한 차림의 두 사내가 큰 마대 자루를 가지고 들어섰다. 창구 직원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이들을 내실로 안내했다. 자루에는 현금과 수표가 가득했다. 이들은 십 수억 원이라고 밝히고 입금을 당부한 뒤 서둘러 자리를 떴다. 직원이 돈을 세어보니 그들이 밝힌 액수보다 수천만원이 많았다.
직원이 고객 서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놀랍게도 전화에서는 "○○○장관 댁입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통장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돼 있었지만 실제 예금주는 장관출신의 여당 의원이었다. 예금액은 고쳐졌지만 이 직원은 어이가 없어 언론사에 있는 친구에 이를 알렸다. 그 기자가 취재에 들어갔으나 다음날 은행원 친구의 "더 파면 내가 잘린다"는 읍소에 고민하다가 취재를 중단했다.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공직자 재산공개를 밀어붙일 때의 일화다. 허겁지겁 부동산을 팔고 예금을 인출해 친척 명의로 돌리는 법석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을 남기고 의원직을 사퇴했으며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 등 많은 의원들이 물러났다. YS 정부는 이렇게 서슬 퍼렇게 시작했다. 그러나 정권 후반은 김현철 씨의 비리, 한보사건 등 수많은 부패사건으로 일그러졌다.
DJ 정부도 그랬다. 초반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재벌들이 무너지고 곳곳에서 구조조정이 벌어지는 마당에 부패는 발 붙일 틈이 없었다. 97년 대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였던 최규선 씨도 정권 출범 첫 해에 비리혐의로 조사를 받고 외국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정권의 후반에는 최씨가 실세인 권노갑 씨, 대통령의 막내인 김홍걸 씨의 줄을 잡고 돌아와 분탕질을 치다가 구속되는가 하면 게이트 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리 사건들이 잇달았다.
노무현 정부도 이제 중반을 맞고 있다. 청와대를 비롯 정부 여당 공기업에 포진해 있는 ‘노무현 사단’이 업무에도 익숙해지고 자신감도 생길 때다. 아울러 인맥도 넓어졌을 것이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형님 동생도 많아졌을 것이다.
현 정부는 지난 2년 동안 도덕적으로 아직 크게 흠집 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부터 조심해야 한다. 그 동안 신뢰를 쌓아온 형님 동생들의 거절하기 힘든 청탁과 대가가 몰려들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두 정부의 처참했던 임기 후반을 생각하면서 초심을 잊지 말고 자세를 다 잡아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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