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연극배우 이해랑씨(1916~1989)를 인터뷰하면서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배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이다. 거지에서 제왕까지, 청년에서 노인까지 배우는 수많은 생을 연기한다. 천하를 호령하고, 애끓는 사랑을 하고, 패륜아가 되기도 한다. 한 인간이 어떻게 그처럼 많은 생을 살 수 있겠는가. 나는 한평생 배우로 살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
지난 22일 세상을 떠난 배우 이은주씨의 빈소에서 영화배우 문성근씨는 이렇게 말했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했던 인물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한다. 충분한 휴식 없이 계속 여러 인물들을 연기하다 보면 어떤 캐릭터에 함몰되어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이은주씨가 25살 꽃다운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나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그가 왜 자살했는지 우리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가 작년에 출연했던 영화 ‘주홍글씨’의 후유증으로 괴로워했다는 것, 죽기 한달 전쯤 병원에서 우울증 증세로 치료받은 적이 있다는 것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숨겨진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유가 있든 없든 간에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배우라는 직업에서 오는 고통이 그의 우울증을 악화시켜 자살충동을 이겨내지 못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은주씨는 영화배우로, TV탤런트로 차곡차곡 자기위치를 다져왔다. 연예담당 기자들은 그가 ‘스타’가 되기보다 ‘배우’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맡은 역을 열심히 연구하고 깊이 몰입하는 성실함 때문에 영화감독들이 선호하는 배우였다고 한다. 배우의 자살에서 흔히 나타나는 망가진 생의 흔적이 그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18살에 교복CF 모델로 등장한 그는 영화 ‘오!수정’ ‘주홍글씨’ ‘태극기 휘날리며’등과 TV드라마 ‘카이스트’ ‘불새’등에 출연하면서 인기배우로 꾸준히 성장했다. 화려하거나 끼가 넘치는 배우는 아니지만 단정하고 풋풋한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10대에 발을 들여놓은 후 주목받는 배우로 커나간 7년 간의 연예계 생활은 그에게 꿈과 좌절, 불안과 희망, 유혹과 갈등이 반복되는 시간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연예인이란 기본적으로 ‘선택을 기다리는 직업’이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스포트라이트와 소외감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며, 항상 대중 앞에 노출되다 보니 스트레스를 풀 적당한 방법조차 찾기 어려운 직업이다. 여자의 경우 시달리는 강도가 더 심할 수 있다.
이은주씨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극적인 배역을 자주 맡으면서 후유증을 앓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작년에 찍은 ‘주홍글씨’의 후유증이 심했다고 한다. 그는 ‘주홍글씨’에서 도발적인 욕망으로 방황하며 파멸로 치닫는 재즈가수 가희 역을 잘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그 강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자신이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애인과 함께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음을 맞는 가희를 연기한 후 그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너무 몰입해 빠져 나오기 어렵다. 다음에는 발랄한 역을 맡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한 노출연기에 대한 후회도 정신적으로 약해진 상태에서 견디기 힘든 자책으로 이어진 것 같다.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만으로도 충격을 받고 어두운 터널에 갇히는 때가 있다.감동을 주는 훈훈한 작품의 충격도 만만치 않다. 오랜 세월 마음깊이 숨어있던 어떤 감정이나 상처를 칼로 도려내듯 쑤셔내어 오랫동안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예술적으로 순화하고 성장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단 한번이라도 연기자의 고통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그들이 겪는 심각한 후유증을 이해하고 배려한 적이 있을까. 그들이 갇혀있는 음습한 터널을 상상한 적이 있을까. 그들처럼 좋은 배우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한 적이 있을까. 그들이 없다면 우리의 생이 얼마나 삭막할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이은주씨의 죽음은 배우들에 대해서, 우리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될 친구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앓고 있는 직업병에 대해 연민을 품게 한다. "엄마 미안해 사랑해"라고 쓴 그의 혈서를 보며 ‘멋진 직업’의 그늘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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