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2월26일 러시아 혁명가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39년 졸(卒). 남편 레닌이 워낙 걸출한 인물이었던 터라, 크룹스카야라는 이름은 늘 레닌과 묶어 거론되곤 한다. 1898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한 뒤 1924년 레닌이 죽을 때까지 크룹스카야는 남편과 떨어져 산 적이 별로 없었으므로, 이런 관행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크룹스카야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제 나름의 교육 이론을 연마한 독립적 지식인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군인의 딸로 태어난 크룹스카야는 유년기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전문학교 재학 시절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 뛰어든 그녀는 노동자 야학 교사 생활을 하다 레닌을 만났고, 유형과 망명과 소비에트공화국 건설로 채워질 그 이후의 삶을 함께 했다. 10월혁명 이전에 이미 ‘국민교육과 민주주의’(1915)라는 저서를 냈을 정도로 교육이론에 관심이 많았던 크룹스카야는 혁명 이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가 이끌던 교육인민위원회의 부(副)인민위원을 맡아 소련 교육정책의 기초를 닦았다. 여성 정치인답게 그녀는 여성의 권익 옹호에도 앞장섰다. 1910년 독일 노동운동가 클라라 체트킨의 제안에 따라 3월8일로 정해진 국제 여성의 날이 소련에서 국경일로 지정된 데도 크룹스카야의 힘이 컸다.
혁명가 우두머리의 아내라는 점에서 크룹스카야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내 장칭(江靑)과 비교될 만하다. 크룹스카야는 혁명정권 수립 과정의 헌신이라는 점에서 보면 장칭보다 훨씬 더 혁명적이었지만, 혁명 이후 권력투쟁 과정의 능동성을 놓고 보면 장칭보다 훨씬 덜 혁명적이었던 것 같다. 남편이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던 스탈린이 집권한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당의 원로로서 존경 받았지만, 정치권력으로부터는 동떨어진 만년을 보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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