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청계천 주변 상가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탱크도 조립할 수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우스개만은 아닌 것이, 없는 게 없이 오만 가지 물건을 다 취급하고 사고 팔다 보니 나온 말이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주변 노점상들은 동대문운동장 쪽으로 옮겨갔지만 거기서 멀지않은 곳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 바로 종로구 숭인동 벼룩시장이다. 1980년대말 생겨난 숭인동 벼룩시장은 이전의 ‘화려한’ 명성에 비하면 크게 위축됐지만 지금도 만원짜리 한 장이면 양복 정장에 구두까지 마련할 수 있고, 수백만원짜리 중고 밍크코트와 여우목도리를 10만원에 구입하는 횡재도 할 수 있다는 명물 거리다.
차가운 바람이 옷 속을 사정없이 파고드는 날씨였던 24일 오후. 50여명의 노점상들이 동묘공원 담벼락을 등지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숭인동 벼룩시장에서 매매되는 주요 물품은 중고 의류다. 옷값은 보통 1,000원. 하지만 가끔씩 나오는 명품은 10만원을 넘기도 한다. 이러한 옷들은 주로 아파트단지 등에 설치된 재활용품 수거함에 모인 것들로 숭인동 상인들은 지역 부녀회와 1년 단위로 계약해 1㎏에 250~300원에 구입해온다.
3년 전부터 이곳에서 옷을 팔고 있다는 한 40대 상인은 "아파트단지를 돌며 하루에 1.5톤 정도를 사가지고 와서 팔고 있다"면서 "압구정동이나 동부이촌동 등 부유층이 사는 곳에서 나온 옷은 불티나게 팔린다"고 말했다.
노점 앞에 2톤 트럭이 도착해 가득 싣고 온 옷을 쏟아놓을 때면 수십명의 손님들이 좋은 물건을 차지하려고 한꺼번에 달려들어 쟁탈전을 하는진풍경도 벌어진다.
고가 명품의류를 취급한다는 이상범(59)씨는 "이민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직접 사거나 명품만을 수거하러 다니는 중간상인들로부터 구입해 1주일에 30여벌 이상 팔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 흘러나오는 옷 중에 쓸만한 고가품이 많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쇼핑객이 몰려오는가 하면 인터넷 옷가게를 운영하는 상인들이 무더기로 사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정모(42·여)씨는 "옷가게를 열려고 한번에 50벌씩 사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노점상 중에는 많게는 하루 50만~60만원까지 수익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는 귀띔이다.
옷 외에도 눈길 끄는 물건은 많다. 1962년 발간된 을유문화사 판 ‘한국사’는 2만원, 1973년판 ‘한국사대계’(삼진사 발행) 12권짜리 한 질도 4만원이면 살 수 있다. 쌀 한 가마니에 7,000원 하던 당시의 정가를 그대로 받는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24만원짜리 전기밥솥이 6만원, 펜티엄3급 PC가 20만원, 삼성 노트북 컴퓨터가 13만원이다. 이순철(35·회사원)씨는 "고급 스키장갑을 1만원, 등산화는 2만원에 샀다"면서 "새것이나 다름없는 중고품을 숭인동 벼룩시장에서는 10분의 1가격으로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변에는 노점상 말고도 골동품을 취급하거나 특이한 수입품을 판매하는 가게도 늘어서있어 볼거리도 쏠쏠하다. 고서화, LP레코드판, 근대사자료, 추억의 놀이상품, 영화포스터, 중고TV를 사고파는 곳도 둘러볼 만하다. 북한의 ‘평양담배’를 쌓아놓고 1갑에 1,000원씩 파는 노점상도 있다.
컴퓨터 관련 매장을 운영하면서 이곳 노점상 관리를 맡고 있는 류성욱(60)씨는 "1,000원만 갖고도 ‘보물’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숭인동 벼룩시장 거리"라면서 "250여명의 노점상들이 빽빽이 들어서는 휴일 오후에는 좋은 물건들도 많이 나오고 볼거리도 넘친다"고 말했다.
최진환기자 choi@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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