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임시국회에서 우려했던 일이 기어이 벌어지고 말았다. 21일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분식회계와 관련된 증권집단소송법의 일부 규정을 2년 유예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아직 처리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14일의 당정협의회에서는 공정거래위원회와 열린우리당이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에 합의했다. 출자총액제한 적용 기준을 현행 자산 5조원에서 6조원으로 높이고, 부채비율 100% 졸업기준 조항도 1년간 유예하기로 한 것이다. 참여정부가 내걸었던 화려한 경제개혁 로드맵이 빛 좋은 개살구임이 드러난 것이다.
증권집단소송법은 참여정부의 거의 유일한 경제개혁법이다. 증권집단소송법의 개악은 참여정부가 경제위기를 내세운 재벌들의 떼쓰기에 밀려 재벌개혁정책을 포기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다. 물론 열린우리당과 정부는 어려운 경제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2년간 미루는 것일 뿐 법은 반드시 시행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약속을 어찌 믿을 수 있는가. 법을 시행키로 한 2년 뒤는 참여정부의 임기가 1년 남아 있는 시점이다. 차기 대통령 선거국면에 접어들어 각종 이해집단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게다가 2년 뒤에는 증권집단소송의 범위가 자산 2조원 이상이 아니라 모든 상장·등록법인으로 확대된다. 재벌과 기업들이 증권집단소송법의 재유예를 추진할 것임은 불 보듯 훤하다. 정치권에서도 선거를 의식해 법 시행을 차기 정부로 넘기자고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법을 엄정하게 시행할 수 있겠는가.
공정거래법 시행령의 개정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공정위와 여당은 출자총액제한제의 원칙을 변경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경제 규모 확대를 감안한 자산 기준의 소폭 상향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정합의를 기준으로 하면 출자총액규제를 받는 기업집단의 수가 현재의 12개에서 8%개로 줄어들게 된다. 부채비율 100%에 따른 졸업기준 폐지를 1년 유예한 것은 롯데, 삼성 등 이 조항의 폐지로 인해 당장 문제가 되는 기업집단을 배려한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떼를 쓰면 출자총액제한과 같은 규제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경험을 재벌들이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1조원의 양보를 얻어낸 재벌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 완화를 요구할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규제를 완화한다면, 출자총액제한제와 같은 개별 규제는 물론 재벌개혁의 원칙마저 흔들리고 말 것이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불과 두 달 전이다.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반대를 물리치고 공정거래법을 강행 처리했다. 그런데 어째서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이를 완화시켜 법 제정의 취지를 스스로 훼손시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도 법안도 아닌 시행령에서 출자총액제한을 완화할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제도 자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을 시행령을 통해 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공정위는 출자총액제한제도가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가 아니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지만, 이번에 스스로의 주장을 뒤집고 말았다.
1999년에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부활된 뒤 정부와 여당은 적용제외와 예외인정 확대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제도 자체의 실효성을 훼손시켜 왔다. 그 배경에는 투자를 볼모로 하는 재계의 떼쓰기가 있다. 그러나 출자총액제한을 완화하면 재벌들이 5년 뒤, 10년 뒤를 내다보고 적극적으로 투자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번 시행령 개정으로 규제를 일시 벗어난 재벌은 좀더 확실한 안전판 마련을 위해, 이번에 규제를 벗어나지 못한 재벌들은 아쉬운 마음에 로비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누구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경제를 위해 앞장서야 할 정부와 정치권이 더 이상 개혁입법을 후퇴시켜서는 안 된다.
손혁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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