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자 쿼크 전자 이온 중성자…. 눈으로 보이지 않는 원자의 세계는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전기를 띈 입자에 전기장을 걸어 속도를 높인다’는 양성자 가속기 역시 물리학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모호한 연구를 위한 값비싼 기계로 여겨질 뿐이었다.
이처럼 과거 순수과학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에 머물렀던 양성자 가속기가 실생활과 밀접한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개발해 시판에 들어간 ‘이온 주입 이발기’다. 이 이발기(일명 바리캉)의 날은 질소의 음이온을 초속 1,000㎞로 가속해 스테인리스스틸 조직 안으로 쏘아 넣은 것으로, 과거 티타늄 코팅 수입 날에 비해 강도가 두 배 이상 높은 게 특징이다.
‘21세기 물리학의 결정체’라고도 불리는 양성자 가속기는 양(+)전하를 띤 양성자 양쪽에 전기장을 걸어 전기장 양극 사이를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하도록 만든 장치다. 양전하를 띤 입자는 양(+)에게서 멀어지면서 음(-)을 향해 가려는 성향을 지닌 탓에 음극을 향해 빠르게 움직인다.
양성자가 초속 500㎞(시속 약 180만㎞)로 움직일 때 갖는 에너지는 분자에서 원자를 떼어낼 정도의 힘인 약 1keV(eV=전자볼트). 속도가 빠른 총알이 더 위협적이듯 양성자 속도가 초속 5,000㎞, 5만㎞, 13만㎞, 26만㎞로 증가하면 에너지는 100keV, 10MeV, 100MeV, 1GeV와 같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같이 막대한 에너지는 양성자를 물질을 이루는 원자 사이로 집어 넣거나 무거운 원자핵을 파괴하는 등 지금까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했던 많은 작용들을 가능케 한다. 또한 양성자 가속 원리를 양성자보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이온’에 활용해 이를 물질에 주입하면 새로운 형질을 지닌 신물질 개발에도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온 주입 이발기’에 쓰인 이온빔은 음전하를 띈 질소 이온을 양성자 가속기의 원리로 가속해 금속(스테인리스스틸) 분자 틈으로 주입해 만든 것이다. 금속은 분자들이 그물처럼 촘촘히 짜여 이뤄진다. 그런데 이 사이사이로 입자가 작은 이온이 끼어 들면 강도가 세지거나 탄력이 높아지는 등 성질이 바뀌게 된다. 지금까지는 분자 틈으로 이온을 주입할 방법이 전혀 없었지만, 양성자 가속기의 원리를 활용해 질소 이온을 빠르게 금속 표면으로 돌진해 비집고 들어가도록 함으로써 강도가 훨씬 센 금속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원자력연구소는 한 중소기업의 의뢰를 받아 투명한 다이아몬드에 이온빔을 쪼여 검정이나 갈색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수소 양성자를 실리콘 표면에 주입하면 반도체에 쓰이는 SOI 웨이퍼(절연체 위의 얇은 규소판) 제작도 가능하다. 강하고 빠른 이온빔을 칼처럼 이용해 금속을 깎아낼 수도 있다. 현재 원자력연구소가 한창 개발 중인 ‘이온빔 주삿바늘’은 가공 후 금속 표면에 남아있는 불필요한 찌꺼기들을 이온빔을 이용해 모두 제거한 것이다. 이밖에 양성자를 통한 항암 치료기, 양성자나 이온을 쪼인 신종 유전자 개발, 우주 부품의 방사선 내성 평가, 플라스틱 지뢰 탐지기, 이온을 주입해 탄성을 높인 골프 공 등 양성자 가속기 활용 분야는 계속 넓어지고 있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도움말 한국원자력연구소 양성자 기반 공학기술개발사업단 최병호·김계령 박사>도움말>
■ 국내 20MeV 수준 양성자 가속장치 완성
우리나라의 양성자 가속기 개발사업은 2002년 7월 과학기술부 ‘21세기 프론티어연구개발사업’의 하나로 시작돼 올해 7월 1단계가 마무리된다. 10년간 총 사업비는 1,286억원이며, 주관 연구기관인 한국원자력연구소 내 양성자 기반 공학기술개발사업단이 관련 장비 및 활용 분야를 개발 중이다.
연구단은 1단계 사업을 통해 20MeV 수준의 양성자 가속장치를 완성했다. 규칙적인 힘으로 그네를 밀어 높이 올라가도록 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양성자에 일정한 간격으로 힘을 가하는 ‘교류형 가속기’다. 형태 상으로는 길이를 늘리며 에너지를 단계적으로 높일 수 있는 ‘선형 가속기’에 속한다.
2008년까지 계속되는 2단계 사업에서는 가속기 수준을 60MeV까지 끌어올린 후 2012년 마무리되는 마지막 단계를 통해 100MeV급 장치를 만든다는 게 최종 목표다. 20MeV급 이하 가속기는 플라스틱 지뢰 탐지기나 각종 기능성 신소재 등에 사용할 수 있다. 향후 100MeV급 가속기가 완성되면 반도체용 웨이퍼나 신종 유전자원 등 양성자 차원의 과학적·산업적 성과가 쏟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가속기 개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장치 설치를 위한 부지 선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점. 가속기 크기는 1MeV에 1c씩 늘어난다. 때문에 최종 목표인 100MeV 가속기와 전력 및 용수 공급시설, 연구실과 같은 지원시설 등을 포함하면 최소 10만평 이상의 부지가 필요하다. 연구팀은 부지 결정 지연으로 가속기의 최종 완성 시기가 최소 1년 정도 늦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김신영기자
■ 용어설명
▦양성자 원자를 구성하는 요소인 소립자 중 하나로 양전하를 띠며 ‘프로톤’이라고도 한다.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가 강하게 결합해 이뤄져 있다. 원자 속의 양성자 수가 그 원자의 화학적 성질을 결정, 원자번호가 된다. 질량은 중성자보다 약간 작고 전자보다는 1836.12배 무겁다.
▦eV 전자볼트. 1eV는 1개의 전자, 혹은 그것과 같은 양의 전하를 갖는 입자가 양극의 전위 차이가 1V(볼트)인 전극 사이에서 가속될 때 얻는 에너지를 뜻한다.
▦이온(ion) 평소 전하를 갖지 않는 원자나 원자 뭉치가 양, 또는 음전하를 띄게 된 상태. 그리스어로 ‘간다’를 뜻하는 ‘이오나이’에서 유래했다. 음극으로 향하는 것을 ‘양이온(cation)’, 양극으로 향하는 것을 ‘음이온(anion)’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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