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의 소설가 고 명천(鳴川) 이문구(李文求·1941~2003) 씨가 고향 관촌의 왕소나무로 뿌듯이 되살아났다. "화장해 고향에 산골(散骨)해 달라"던 유언대로 한 줄기 바람으로 떠난 그이지만, 그를 못 잊는 문인들이 기념사업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범문단 문인들과 정치 사회 재야인사 100여 명으로 구성된 ‘명천 이문구 기념사업회’(위원장 김주영)는 명천의 생가와 대천해수욕장 뒤 관촌의 솔밭 인근 부지에 명천문학관을 건립키로 했다. 2006년 말 1차 완공 예정인 문학관은 고인의 유품 등이 전시된 기념관 차원을 넘어 문인들이 머물며 집필하고, 세미나와 전통문화체험 등도 가능한 문화공간으로 꾸며진다.
사업회는 매년 보령문학제를 개최하고, 명천이 그의 작품에서 즐겨 구사한 충청도 사투리로 이야기대회를 여는 등 푸짐한 문화축제로 꾸려나갈 예정이다. 교보문고도 내달 5일까지 이문구특별도서전을 열고, 전국 매장과 인터넷을 통해 그의 작품집을 특별 판매키로 했다.
‘문예중앙’ 봄호는 명천이 간직했던 지인들의 편지 가운데 10통을 공개, 추모의 뜻을 더욱 간절하게 하고 있다. 이경철 문예중앙 주간이 ‘그립소이다. 명천대덕(鳴天大德)’이라는 글을 통해 소개한 편지에는 스승 김동리씨가 명천의 문운(文運)을 비는 토막 글부터 대학동창인 소설가 박상륭씨가 ‘너 이 형님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하며 캐나다에서 보낸 원고지 100매 분량의 편지 등 다양하다.
그 중에는 명천과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박용래 시인의 편지가 유독 많다. 박 시인의 1979년 2월 편지는 새해 인사를 전하고선 명천의 자제(1남1녀)에 대한 안부로 이어진다. "진주가 따로 있으리요. 초롱초롱한 어린이의 눈동자가 그것인걸. 네 개의 진주로 빛나고 있을 형의 집. 보리 필 무렵 하루는 물어물어 찾을 양 지금부터 설레이오." 하지만 그는 지병으로 명천을 만나지 못한 채 이듬해 11월 별세했다.
출옥 한 뒤 경기 안성에 터를 잡은 고은 시인은 농민시를 쓰겠다는 각오를 내보이기도 한다. "참, 당신, 내가 ‘산너머 남촌’ 읽고 있는 줄 모르지요? 농민신문 구독하는 줄 모르지요?…나도 농민시를…" 얼마 전 별세한 이형기 시인은 88년 편지에서 명천의 동시집 ‘개구장이 산복이’를 잘 읽었다며 "소설 쓰는 분이 시까지 이렇게 잘 쓰면 시인이란 작자들은 멀 먹고 살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고 썼고, 문학평론가 유종호씨는 "이 시로 이형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 갈 시를 만들어냈습니다"라고 적었다. 정현종 시인은 1975년 미국 아이오와에 머물며 보낸 편지에서 "뒤의 그림으로 되어 있는 아가씨는 르노아르가 그린 네 색시감인데, 마음에 들면 실물을 보여줄 수도 있다"며 ‘우정’을 과시했다.
명천에게는 ‘관촌수필’ ‘우리동네’ 등 우리 문학의 보석 같은 명작들과, 일생을 두고 보여준 한국문학과 문단을 향한 애정과 헌신이 다가 아니었던가 보다. 이제 그는 ‘관촌 왕소나무’로 되살아나 그 너른 가지와 세심한 뿌리로 후덕한 그늘과 응집의 힘을 베풀 참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