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해도 드라마에 꼭 등장하는 것이 악녀였다. 김희선이 출연했던 SBS ‘미스터 큐’나 ‘토마토’가 증명하듯, 악녀는 온갖 악행으로 드라마를 극적으로 만들고, 그래서 캐릭터는 미움을 받아도 배우는 인상적 연기로 단숨에 주연급으로 올라서곤 했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에는 악녀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여주인공을 지극히 사랑하는 남자들이 그 자리에 있다.
MBC ‘슬픈연가’는 화정(김연주)같은 악녀가 있긴 하지만, 드라마 초점은 오랜 연인인 혜인(김희선)과 준영(권상우), 뒤늦게 혜인을 사랑하게 된 건우(연정훈)의 관계에 맞춰져 있다. KBS ‘쾌걸춘향’ 역시 채린(박시은) 같은 악녀 대신 여주인공을 너무 사랑하다 ‘악남’으로 변하는 변 사장에 더 비중을 둔다. SBS ‘봄날’에는 아예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남자 둘을 중심으로 한 대립관계가 요즘 드라마의 경향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남성 캐릭터의 변화 때문이다. 김희선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던 시절, 여주인공과 잘되는 남자 캐릭터는 ‘착한 재벌 2세’들이었다. 그들은 재벌 2세임에도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졌고, 여주인공의 착한 심성을 먼저 알아보고 조건 없는 사랑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요즘 여주인공들을 사랑하는 남자들은 어딘가 문제 있다.
‘슬픈연가’의 건우는 굉장한 바람둥이였고, ‘해신’의 염장은 주인공을 죽일 운명의 악역이다. 어디에도 KBS ‘겨울연가’의 준상(배용준)처럼 순수한 로맨티스트는 없다. 그들은 여주인공들에게서 잃어버린 순수함을 찾았기에 그 여자에게만큼은 기꺼이 ‘바람둥이’나 ‘악역’에서 로맨티스트로 변신한다. 여주인공들은 모두 그들에게 조건 을 요구하는 대신 인간적 모습을 보고 다가서고, 남자들은 여주인공을 통해 순수를 되찾으며 그녀를 사랑한다. ‘봄날’의 은섭(조인성)처럼, 사랑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여주인공 역시 사랑이란 조건이 아닌 마음의 선택이기에, 그 때문에 상처 입는다. 그만큼 라이벌 남자주인공보다 더 다양한 심리를 보여줄 수 있다.
‘해신’의 송일국이나, KBS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지 PD(지현우)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이유와도 통한다. 이제 여성들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남자를 바라지 않는다. 그건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이고, 그런 남자에겐 자기말고도 얼마든지 사랑해 줄 여성이 있다. 대신 지 PD처럼 ‘싸가지’라는 소리를 들어도 나에게 사랑을 쏟고, 평소에는 냉정할지라도 나로 인해 웃을 수 있는 남자가 더 매력적이다.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시청자들 역시 자기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는 내면을 가진 캐릭터를 선택한다. 다시 말하면, 신데렐라 스토리는 끝났다. 대신 내가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고, 내가 ‘선택’한 남자에 관한 드라마 시대가 온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 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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