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畵伯)’ 대신 ‘각백(刻伯)’으로 불린 추상조각의 선구자 우성(又誠) 김종영(1915~1982)은 작품과 삶 모두 간결하고 고요한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기행을 일삼아 수많은 얘깃거리를 남기는 여느 예술가들과 달리 은둔을 좋아하는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국조각의 1세대로서 그가 화단에 미친 영향은 절대 조용히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는 자연의 질서를 동양의 사고로 사유하되 서구의 조형감각으로 풀이한 추상조각을 도입· 정착시킨 중추였고, 1980년 정년 퇴임 때까지 32년간 서울대에서 후학을 이끈 대학미술교육의 선도자이기도 하다. 정중동에 가까운 생애와 작품을 보여준 그의 탄생 90주년을 맞아 미술계가 분주하다. 조각 뿐 아니라, 드로잉 등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회고전이 덕수궁미술관 등 3곳에서 동시에 열린다.
우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02-2022-0600)이 24일 시작하는 ‘한국현대조각의 선구자 : 김종영’전은 30년대 유학시절부터 추상조각으로 발전하는 과정 등 그의 조각세계 전반을 아우른다. 김종영은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하며 조각에 입문했는데, 초창기에는 점토 석고 나무 청동의 표현기법을 익히며 사실주의적 인물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조각의 모티프가 인체에 제한된 데 회의를 느끼고 자유롭게 표현할 방법을 갈구했고 추상미술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김종영이 추상조각으로 길을 튼 건 50년대 이후다. 2차 대전 후 서구에 확산된 철 용접 조각을 접한 뒤, 그는 58년 첫 철조작품인 ‘전설’을 내놓는다. 문의 모습을 띤 것 같기도 한 이 작품은 철 선 몇 개 만으로 제작한 것으로 한국화단에 50년대 후반 나타난 앵포르멜 경향을 받아들였다. 60년대부터는 아예 구체적으로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 추상조각을 제시하며 작품에도 제목 대신 제작번호를 붙여나갔다.
"복잡하고 정교한 기법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숙달된 특유의 기법이 예술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표현과 기법은 단순하기를 바란다"던 그는 돌을 갈고 나무를 쪼개 삼각, 사각의 기본형태로 돌아간 기하학적 조형을 만들어 내놓았다.
그러나 단순하고 소박한 그의 조각에서 막 싹을 틔우거나 자라나는 식물의 강한 생명의 기운을 읽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종영미술관 큐레이터 권연진씨는 "김종영은 늘 근원의 형태를 고민했으며, 자연과도 같은 본질을 추구하고자 고심했다"고 말한다.
김종영은 조각 뿐 아니라 조각에 도달하기 전 과정을 드렴로잉 한 것도 약 3,000점이나 남겼다. 김종영미술관(02-3217-6484)은 25일부터 ‘多·景·多·感(다·경·다·감): 조각가 김종영의 풍경드로잉’전을 갖는다.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자연의 물체 같은 조형세계’를 지향한 김종영이 조각의 소재를 구한 주변의 식물 산 등 자연풍경을 묘사한 드로잉들이 나온다. 학창시절 졸업여행으로 다녀온 금강산 풍경, 북한산이나 동네풍경, 세한도를 비롯해 옛 그림을 모방한 그림 등이 선보이는데 어릴 적부터 익숙한 먹을 사용하거나 밑그림 없이 펜이나 매직으로 시원스럽게 그려나갔다.
원갤러리(02-514-3439)도 25일부터 단아한 정물드로잉으로 그의 회고전을 꾸민다. 세 곳 모두 전시는 5월15일까지.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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