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9년 2월21일 독일 법학자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1861년 베를린에서 졸(卒). 프로이센 법무장관을 지내기도 한 사비니는 역사법학의 창시자다. 란츠후트대학 교수를 거쳐 1810년 베를린대학 설립 이래 그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사비니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안톤 티보와 함께 당대의 대표적 로마법학자였다. 이 두 사람 사이의 법전논쟁(法典論爭)은 19세기 프로이센의 법학계와 정치권을 뜨겁게 달군 바 있다.
법전논쟁은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독일에서 움튼 민족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점화했다. 나폴레옹법전의 단아함에 매력을 느끼던 자유주의적 성향의 안톤 티보는 1814년 ‘단일한 독일 일반민법전의 필요성에 대하여’라는 팸플릿을 발간해 독일을 통일하려면 우선 사법(私法)·형법·소송법의 통일법전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각 지방마다 분열돼 있던 법체계를 단일화해 민족 통합을 꾀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프랑스혁명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을 들여오자는 불온한 음모로 비쳤다. 사비니가 곧 이어 출간한 팸플릿 ‘입법 및 법학에 대한 우리 시대의 사명에 대하여’는 이런 보수주의자들의 염%B려를 집중적으로 담아냈다.
사비니는 이 팸플릿에서 언어가 그렇듯 법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민족과 함께 발달하고 사멸하는 민족정신의 표현이라고 지적하고, 정책적 이유로 국민의 법적 확신을 무시한 채 법전을 편찬해서는 안 된다고 논박했다. 법전에는 그 때까지의 법에 담긴 지도원리가 담겨야 하는데, 당대 법학은 이 지도원리를 또렷이 밝혀낼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므로 법전을 편찬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이 사비니의 주장이었다. 논쟁은 당대 독일의 정치적 세력 관계를 반영해 사비니의 승리로 끝났고, 독일은 거의 한 세기 뒤에야 근대적 법전을 가지게 되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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