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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엔 술향기 그득해라/ 계간‘시인세계’ 기획특집 ‘시인과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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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엔 술향기 그득해라/ 계간‘시인세계’ 기획특집 ‘시인과 술’

입력
2005.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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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이 1·4후퇴 때 겪은 일이다. 콩나물 시루 같은 피란 열차에 몸을 구겨 넣고 3박 4일을 달려 남행하던 길의 아침 끼니 때였다고 한다. 정차한 간이역 플랫폼으로 너나 없이 솥단지를 들고 나와 밥을 짓느라 부산한데, 한 귀퉁이에서 어떤 여인이 약주를 팔더란다. 주성(酒聖)으로 불리며 그 유명한 글 ‘주도(酒道) 유단(有段)’을 남긴 그다. 한달음에 달려가 한 사발 시켜 먹고 두 잔째를 주문했는데 여인은 그저 빙긋 웃고 마는 것 아닌가. 눈웃음%을 달고 곁에 섰던 한 신사가 대신 답을 한다. "목 마르신 것 같아서 한 잔 권했지만 이 술은 파는 게 아니요." 피란길 아침 저녁으로 한 잔씩 하려고 옷 보따리 대신 챙겨온 술이었고, 그 여인은 신사의 아내였던 것이다. 조지훈은 이 경험을 두고 "술로써 오달(悟達)한 그 체관(諦觀)과 유유함이 이 혼란 중에 한층 의젓하고 멋이 있어서 부러웠다"고 ‘술은 인정이라’는 글에 적고 있다.

문학세계사가 계간 ‘시인세계’ 봄호에 질펀한 ‘술판’을 벌였다. 술과 문학에 관련된 시인 평론가 12명의 글을 모은 기획특집 ‘시인과 술’이다. 술과 시(인)의 질긴 인연이야 새삼스럽지 않고, 그 인연의 논거 역시 동서고금에 널린 터이다. 평론가 정규웅씨는 우리 시단의 ‘시인과 술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취기와 광기를 저버리는 것은 시인에게는 죽음"이라고 했던 고은 시인, 취중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김수영 채광석 임홍재 시인, 숨지기 전 20여 일 동안 소주만 100여 병을 마시며 300여 편의 시를 썼다는 박정만 시인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허만하 시인은 술과 시흥에 도도(陶陶)히 취한 김종길 시인이 인사동의 한 밥집에서 써준 ‘취호(醉毫) 일필’을 이야기 했고, 이탄 시인은 낯 모르는 여인과의 아찔했던 동침 체험을 적었다. 장석주 시인은 "술이 없었다면 김관식의 좌충우돌의 미학이나, 김종삼의 청결한 금욕적 탐미주의, 조태일의 남성적 서사의 시세계가 가능했을까" 반문했다.

함민복 시인은 ‘어민후계자 함현수’라는 시를 썼던 어느 봄날의 정경을 술 맛 나게 적고 있다. 글 쓸 게 태산인데 마을 후배 함현수씨가 ‘야성 길러서(고기 낚아)’ 술 한잔 하자고 연신 유혹하는 대목이다. "야성, 좋지. 그런데 글 써야 하는데…" "야성 기른 담에 쓰면 되지 않으껴" "물때 맞춰 고기 잡는 것처럼 글도 때를 놓치면 한 사리 또 기다려야 한다니까" "그럼 시가 물고기껴?" (봄이구먼. 어부도 도깨비한테 홀려 시를 쓰는구만.) "그럼 시 회에다 이거 한 잔?" "미치겠네. 좋아요. 가시겨. 다 신데 무슨 시를 써. 봄에." 탕!(대문 닫히는 소리에 놀라는 봄)

편집인 김요안씨는 서문에 "이번 특집은 시인들의 낭만적 도취와 시적 열정에 대한 그리움이자 행복한 시쓰기를 가능케 했던 하얀 마법(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시적 열정에 취하는 마법을 비유한 표현)에 대한 새로운 주문이 될 것"이라 적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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