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 삼다도의 원명(圓明)선원은 저잣거리에 있다. 제주의 명문이라는 오현고의 이웃이다. 현실보다 이상에 묶이기 쉬운 불교가 중생의 곁으로 바짝 다가간 것이다.
회주는 대효(大曉)스님. 30년에서 꼭 한 해가 빠지는 긴 세월을 여기서 살며 선을 포교의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계종단에서 누구보다 일찍 선 포교에 눈을 뜬 납자인 셈이다. 제주도는 무속의 땅이다. 바람 돌 여자가 많다는 삼다도지만 토착신 역시 그에 못지않은 고장이다. 기성 종교가 토착신과 어울려 지내기는 그리 쉽지 않을 터.
"토착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데 미숙했고 실제로 방법도 몰랐지요. 처음부터 아예 ‘내 입맛대로 하자’는 마음으로 다가갔습니다." 내 입맛이라니, 그게 무얼까. 불교의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해석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면 불교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로 이런 원론적 접근이 그 입맛이었다. 그렇다. 세상의 어떤 갈등과 이견이라도 받아들이고 녹여내서 걸림 없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세계로 나아가는 게 불교일진대 하물며 배척할 무엇이 있겠는가. 함께 어울려 지내면 되거늘.
"삶 그 자체가 그대로 선입니다. 졸리면 잠자고 배고프면 밥을 먹는, 그러한 꾸밈없는 마음을 일상에서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저마다 끼고 있는 색안경을 벗고 맨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거지요. 안경을 벗어버리면 착시현상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마음의 법문’을 일러준다. "원하는 즐거움이 다가오더라도 좋아 당기지 말고, 원치 않는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싫어 떠밀지 말라. 다가오는 즐거움과 고통을 들여다보고 들여다보아, 그 즐거움과 고통의 마음뿌리가 뽑혀서 사라지더라도 이어서 들여다보고 또 살펴보세요."
선가의 언어로 풀이하자면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라는 말이다. 평상심은 일상에서 늘 한결 같은 마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도란 인간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도리를 말한다. 도가 이처럼 일상과 함께 하는 것이니 나날의 삶 자체가 도의 모습일 수밖에. 그러나 평상심에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전제가 있다. 분별(망상)이다. 그래서 앞서 간 사람들은 일렀다. 일상사가 가치 없어 보이고 깨달음의 경지가 고귀하다고 여기는 까닭은, 그러한 상대적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분별에 서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별은 무엇이든 둘로 쪼개놓고야 마는 악마의 칼날이니 분별 앞에서는 모든 것이 토막 날 뿐이다.
"삶의 길에는 숱한 고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힘든 순간은 말을 갈아탈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면 타던 말을 그냥 타고 가는 게 사람의 심리 아닙니까. 그런 인생의 고비가 없다면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놓치는 겁니다. 어려움은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대개는 모르고 살아갑니다. 늘 잘되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신이 잘난 줄 오만에 빠져 세상을 얕잡아 봅니다. 그게 돌이킬 수 없는 함정인데 그걸 모릅니다."
스님은 회광반조(廻光返照)의 화두를 꺼낸다. 회광반조는 이런 어리석은 마음을 자기 내부로 돌려 자신을 비춰보라는 선가의 언어다. 사실 자기 관리에 소홀할 때 분수를 잃게 되고 급기야는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기 쉬운 게 우리네 인생사가 아니던가.
"모든 문제는 ‘나’라는 존재를 잘못 보는 데서 나옵니다. 인간이 돈 명예 권세 등에서 의지처를 찾고 그것으로 나약함을 덮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쁜 여자만 보면 푹 빠져서 그게 행복인 줄 알고, 금덩이에 눈이 멀고, 권력의 달콤한 맛에 취해 삶의 종착역인 것처럼 안주해 버립니다. 올바른 목표를 모르고 헤매게 되니 평생 방황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 길을 바꾼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인생을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잉태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어느 순간의 얼굴을 우리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까?"
스님은 인간의 삶은 생기기 이전과 생긴 이후의 과정으로 전개된다고 풀이한다. 줄여서 ‘이전사(以前史)’와 ‘이후사(以後史)’라고 부른다. 이전사는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기 이전의‘나’이고 이후사는 잉태된 이후의 ‘나’인 것이다. 중생은 이후사를 삶의 전부로 보는데 여기서는 수천, 수만의 가면이 나온다. 이전사는 불생불멸의 자리, 즉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자리다. 반야심경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라고 가르친다. 나라고 하는 실체는 텅 빈 허공과 같은 것으로 그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와 질이 달라진다고 일깨우는 것이다.
"이후사는 상품을 싸는 포장지와 같습니다. 이전사에 충만한 생명력, 자유자재함, 초월적 존재가 포장지에 갇혀 지내고 있는 셈이지요. 부처님도 모든 형상을 벗겨내야 할 포장으로 보았습니다." 스님은 이전사와 이후사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든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주어진 지위를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시합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그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 지위를 자기라고 여깁니다. 잘 나가던 시절(이후사)의 얼굴을 자기 본래(이전사)의 모습으로 보는 겁니다. 엄청난 착각이지요. 이후사의 얼굴은 상대에 따라 변합니다. 자기보다 나은 이에게는 좋은 얼굴, 못한 사람에게는 오만의 얼굴로 대합니다. 본래의 참된 얼굴 대신 가면 쓴 얼굴로 맞는 겁니다." 그러면 본래의 얼굴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자신을 바로 볼 때 가능하다는 얘기다.
"우리는 자신을 바로 보는 데 너무 서툽니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의지처를 보지 못하고 외부에서 찾습니다. 겉으로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낫다고 여기면서도 속으로는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잘못을 자각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의지처가 나타난다. 안타깝게도 거기까지 가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하다.
"참선은 근원을 찾는 수행입니다. 갈등과 함정에 빠진 근원을 밝혀내고 해결방안을 일러줍니다. 바로 의식을 바꿔 주는 등불입니다. 의식을 바꾸는 것이 변신이고 초월입니다. 초월은 죽음을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살아 있을 때도 그 실상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는,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따로 구할 대상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밖에서, 엉뚱한 데서 부처를 찾고 깨달음을 구한다. 스님이 바라는 수행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깨달음은 뭔가 새로운 것을 얻는 게 아니다. 그저 본래의 자기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 대효스님은
"원래 내가 고향인데 따로 무슨 고향이 있을까요."
고향을 묻자 빙그레 웃으며 이런 말로 답을 대신한다. 본래면목이 고향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머리 깎은 지 근 40년 됐지요."
대효스님은 1976년부터 매년 여름과 겨울 ‘삼매체험 선수련회’를 열고 있다. 절집에서 수련회라는 명칭조차 생소하던 무렵에 불자를 상대로 한국의 전통 참선수행을 지도해왔다.
스님의 지도방법은 아주 구체적이다. 초보자에서부터 참선의 일정한 맛을 접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수준에 맞게,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실천하기 쉬운 수행법을 일러준다.
"원래 포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불국사 선원이 개원하던 해 한 철을 나고 제주에 다니러 왔거든요. 당시 원명선원은 비어있는 상태였습니다. 몇 안 되는 불자들의 정성이 마음에 걸려 한 철만 지내고 떠나려고 했던 것이 어느 새 30년 가까이 흘렀네요. 처음부터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으면 이리 오래 살지 못했을 겁니다."
스님의 은사는 지난해 열반에 든 서옹(西翁)선사로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바 있다.
스님은 청에 못 이겨 출가 당시로 기억을 되돌린다. "지금 가면 안 올 겁니다, 이런 말씀을 부친께 했지요." 절에 잠시 공부하러 가는 줄만 알았던 부친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가 봐라"는 한 마디 외에는 굳이 막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와 형제들도 출가한다는 사실을 뒤에야 알게 됐다.
"철들 무렵부터 사람들이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사람들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위치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 희망이 구도의 길로 이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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