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KBS에서 방영한 ‘창덕궁 후원’에서 충격적 장면을 보았다. 철새인 붉은배새매 어미가 모이를 구하러 둥지를 비운 틈을 노려 텃새인 어치가 갓 부화한 새매 새끼들을 쪼아 죽이는 모습이 가히 엽기적이었다. 카메라맨은 새매 새끼들을 살리려고 어치를 쫓아내지 않았다. 냉혹한 자연 생태계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을 뿐이었다.
천성산 내원사 소속 비구니 산감인 지율(知律)의 100일에 이르는 단식 때도 사람들은 지켜보기만 했다. ‘도롱뇽의 친구들’을 포함한 누구도 그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지 않았다.
119를 부르는 이도 없었다. 오로지 단식에 편승했다. 그의 여동생을 비롯해 종교인과 정당원과 환경단체는 종이 도롱뇽을 접었다. 촛불 마당을 열고 단식기도에 동참했다. 전국이 온통 애니미즘의 광풍에 휩싸인 듯했다.
정부와 지율이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공사에 따르는 환경 영향을 공동조사 하기로 합의하고서야 비로소 단식이 중단됐다. 그러나 이 합의의 순간, 민주사회의 기틀인 법치의 정신은 실종됐다. 법원의 판결조차 무시되지 않았던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법 위에 권력이 있다고 했다. 그 위에는 국민정서와 시민단체와 코드가 있고, 맨 위에 ‘떼법’이 군림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난상공론(爛商公論)은커녕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는, 떼법에 휘둘리는 후진사회다.
무엇이 떼법 사회를 만들었나? 법을 무시한 공약 남발이나 정치 행태가 아니던가. 환경 영향을 다시 조사한다고 합의점에 이를까. 합의를 무시하고 또 다시 단식하지는 않을까. 위력을 실감했으니 너도나도 단식에 의존하려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중생화도(衆生化道), 중생회향(衆生回向)의 길이 굳이 자살테러를 연상시키는 단식이어야만 했을까. 천성산의 도롱뇽이 납세자인 국민이나 불량 도시락이라도 고마워하는 어린이들까지 압도하는 중생인가.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생존경쟁을 하는 도롱뇽은 천성산에만 서식하는 게 아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도처에 산재한다. 우리 국토는 60% 이상이 여전히 산지다.
외국인들은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이 아름답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서울엔 온통 터널 투성이다. 평지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선 산자락을 돌아가며 훼손하기보다는 터널을 뚫는 편이 오히려 친환경적이라 할 수 있지 않나. 환경 영향 평가의 기본은 총체적 전과정 평가다.
조영일 연세대 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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