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2월12일 구한말 정치가 이완용이 작고했다. 향년 68. 이완용은 대한제국 주권을 일본에 넘긴 두 차례 조약에서 결정적 역할을 맡음으로써 ‘민족반역’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당시 이완용은 학부대신이었다. 그는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과 함께 조약을 밀어붙였던 바, 이 다섯 대신은 뒷날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섯 해 뒤인 1910년 8월 이완용은 대한제국 총리대신으로서 정부 전권위원이 돼 일본과 병합조약을 체결했고, 일본제국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완용은 학업에서나 정치에서나 총명한 인물이었고,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1882년(고종1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승진을 거듭해 1896년 학부대신에 이르렀다. 열강의 원심력에 휘둘리며 분열과 반목을 거듭하던 조선 조정에서 이완용이 당초 기댄 것은 러시아쪽이었다. 그는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외부대신에 올라 법부대신 이범진과 함께 친일파를 숙청하고 친러파의 리더 노릇을 했으나, 우직하게 러시아만 바라보던 이범진과 달리 이내 친일파로 돌아섰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정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제2차 한일협약 이후 그가 내각총리대신이 된 것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합방 이후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노릇을 했고, 1920년에는 후작에 올랐다. 기미년 3·1운동 때는 독립투쟁을 격렬히 비난하는 경고문을 발표해 자신의 정세관을 또렷이 드러내기도 했다. 이완용은 일본제국에서 그 자신과 조선을 함께 구원할 밧줄을 보았고, 그 밧줄을 타고 당대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오늘날 그 밧줄은 그의 명예의 목을 죄고 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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