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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살아있는 우리 헌법 이야기 - "헌재 재판관 중에는 헌법전문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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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살아있는 우리 헌법 이야기 - "헌재 재판관 중에는 헌법전문가가 없다"

입력
2005.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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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을 둘러싸고 정치 공방이 벌어지는 경우를 제외하면 헌법에 대한 관심이 지난해 만큼 높았던 때도 드물다. 나라를 휘청거리게 할만한 메가톤급 사안들이 위헌 시비를 가리자고 줄지어 헌법재판소 재판관 9인의 재판대에 올랐다. 대통령 탄핵 소추에다 행정수도 이전, 호주제…. 그 동안 9차례 개헌과정의 논란이 대체로 대통령 임기 연장 등을 둘러싼 정치적 사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법 중의 법이라고 할 헌법의 실체에 제대로 주목한 것은 60년 헌정%사에서 최근이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름도 몰랐던 헌재 재판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헌재의 위헌·합헌 결정 순간에 온 나라의 이목이 집중됐으며, 결정이 난 뒤에도 찬반 양론이 분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의 의미와 역할을 좀 알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회과 수업의 일부로 헌법 전문(前文)을 외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 헌법 중 기억 나는 조항을 들어보라면 대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등 몇 가지뿐이다.

40년 넘게 동국대에서 법학을 가르쳤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을 지낸 헌법학자 한상범(69)씨의 ‘살아있는 우리 헌법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하고도 값진 책이다. 8년쯤 전 현암사에서 냈던 것을 다시 손 보고 최근 상황을 추가해 새로 낸 이 책은 우리 헌법의 중요 조항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또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단순히 법 조항의 변화만 살핀 것이 아니라 그 조항의 헌법정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우리 헌법이 모태로 삼고 있는 서양의 법 제정 역사를 따져가며 역사적으로 설명했다. 대학 수업을 위한 헌법 교재나 고시 수험서 등의 1,000쪽을 헤아리는 헌법책만 즐비한 형편에 헌법 전반을 이만큼 명료하고 알기 쉽게 풀어 쓴 책도 드물 듯 싶다.

그러나 저자는 흔한 개설서처럼 이웃 집 불구경 하는 식의 주장없는 책을 쓰자고 펜을 들진 않았다. 교수 신분으로 1960년대부터 줄곧 군사독재에 저항하고 인권운동에 앞장서온 그는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법, 시민의 권리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법에 관한 책"을 쓰고 싶었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우리 헌법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비판하는데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우선 그는 1948년 우리 헌법이 제정되기 전 조선총독부 법제가 식민지 탄압과 봉건 잔재가 결합돼 있는 사이비 근대 법제였고, 광복 후에도 우리 손으로 이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더 큰 문제는 군사정권이 이어지면서 ‘정치권력자의 권력 행사를 규제’하는 것이 본디 목적인 헌법이 ‘시민의 무기’가 되지 못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둔갑한 점이다.

1996년에 검찰이 12·12 쿠데타 주역에 대한 불기소처분을 내리면서 그 이유로 ‘성공한 쿠데타’는 내란이 아니라는 법리를 내세운 것을 두고 그는 "이미 대통령이 되어 버렸으니 기정사실로 수긍해야 한다는 것은 힘의 논리에 굴복한 결과"라며 "군사정권 30여 년은 법률가에게 힘의 논리에 굴복해서 법철학 자체를 포기하는 법적 허무주의를 심어 놓았다"고 한탄했다. 대표적 언론 탄압 조항인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죄와 불고지죄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지만 수사과정에서나 재판에서 이런 법리가 소용 없는 실정이라고 지적한다.

현행 대통령제와 국회, 헌법재판소 관련 조항이나 운영의 문제도 꼬집었다. 대통령이 국가 원수이면서 행정부의 수반이고 필요할 때에 계엄권과 긴급명령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것은 일본 메이지(明治) 헌법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며, 우리 헌정사를 돌아볼 때 남용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대통령 유고시 비록 60일의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은 행정관료인 국무총리가 직무를 대행하는 것도 법의 큰 맹점이다. 특히 헌재 재판관을 두고는 "헌법전문가가 한 명도 없다" "결정문은 재판관을 지원하는 연구관에 맡겨서 외국 이론의 선례로 수식하여 작품을 만든다" 등 쓴 소리를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 헌정사 왜곡을 오로지 독재권력의 탓으로만 돌리지는 않았다. "헌법이 가정하는 정치적 시민은 민주 시민인데, 우리는 몇 세기적 나라님의 백성 행세를 하고 있는가"고 되물으면서 헌법이 관료의 민중지배기술이 아닌 시민의 자유의 기술이 될지 어떨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김범수기자 bski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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