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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자본의 두 얼굴 - 얼굴없는 논객의 ‘맑스 자본론’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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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자본의 두 얼굴 - 얼굴없는 논객의 ‘맑스 자본론’ 논쟁

입력
2005.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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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자본’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서가 하나 출간되었다. 이 책은 당장 두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하나는 저자의 이력이고 다른 하나는 책의 성격이다. 먼저 이 책에는 저자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맑스의 ‘자본’이 족쇄를 벗은 지 이미 17년이 경과한 지금 맑스의 논의가 이제 더 이상 소수 지식인들간의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자가 새삼 이력을 밝히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이 지난해 출판된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그린비 발행)에 대한 반론으로 집필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설서만으로도 빈곤한 수준인 우리의 맑스 연구 현실에서 특정 저작을 대상으로 한 논쟁적 저작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서 그 배경이 또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책의 전체적인 편제는 맑스의 ‘자본’을 해설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이진경에 대한 대립각을 분명하게 세워서 정리하고 있다. 애초 집필 의도가 논쟁적이고 그 대상이 이진경의 책이라서 그런지 책의 목차도 이진경의 책을 많이 따르고 있다. 책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자본’에 대한 해설 부분과 이진경의 논의에 대한 반론 부분이다. 그러나 해설 부분이 논쟁적인 부분에 눌려 있어서 해설적 기능을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일반 독자가 ‘자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이 책에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논리적으로 순차적인 흐름도 부족하고 제기하는 쟁점에 대한 입문적인 소개도 부족하다. 그리고 일반 독자들에게 친화성 있는 현대적인 사례도 별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 책의 장점은 그것의 논쟁적인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논쟁적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좋은 모범을 보이고 있다. 문제의 제기에서부터 반론과 논지를 모아가는 과정이 충실하고 일관되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책의 어느 부분을 보든 필자의 논쟁적 의도는 뚜렷하게 드러나 보인다. 일단 필자의 의도는 맑스의 ‘자본’을 자본주의의 ‘외부’로의 지향으로 파악한 이진경의 해석이 오류라는 것을 논증하는데 모아지고 있다. 필자는 이런 이진경의 시도가 결국 부르주아경제학의 ‘내부’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실패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진경의 시도가 유통주의적 관점에 머물거나 혹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관점으로 귀환하고 만다는 점을 계?8속 논증하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맑스를 생산주의적 관점으로 일관되게 해석하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런 맑스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필자의 논지는 훌륭한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

맑스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논쟁적인 책에 대한 감회는 두 가지로 함축된다. 하나는 무엇보다 반가움이다. 척박한 맑스 연구 풍토에서 진지한 연구서가 나왔다는 소중한 감회가 그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공식적인 학계 외부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 신선함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반가움만큼이나 또 하나 서운한 감회도 감추기 어렵다. 저자가 기울인 많은 노력이 아직 ‘현재’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진경의 책은 미흡하나마 맑스의 ‘자본’이 지향했던 미래의 약속을 ‘현재시제’로 바꾸려는 실천적 고민을 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아직 지식인운동으로서의 코뮨주의에 머무르고 대중운동과 결합할 대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오히려 이진경보다 맑스의 ‘자본’을 더욱 먼 시제로 밀어 버린 듯하다. 일반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쟁점에만 매달린 집필방식, 쟁점을 분배에서 생산으로 끌어올려버린 점, 그리고 이진경이 어렵사리 시도한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해석을 지나치게 가볍게 재단해버린 점 등이 그러하다.

저자의 치열하고 진지한 문제의식을 존중하면서 한 가지 고언을 드리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맑스 연구의 과제는 이제 계급적 인식의 단계에서 벗어나 일상적 실천능력을 검증 받는 단계에 도달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진보의 추진력이 소수 지식인의 머리에서 이미 대중의 어깨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 연구의 중심도 이제는 ‘무엇’을 지향하느냐가 아니라 그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로 옮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진경과 이 책이 모두 아직 전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젊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필자의 안타까움은 조급한 과잉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포위망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또 하나의 동지에 대한 발견일 것이고 많은 격려를 보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 한 가지 제안. 받침을 갖지 못한 일본어가 ‘마르크스’로 표기하는 것을, 받침을 가진 우리말 ‘맑스’로 표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강신준 동아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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