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면 이 땅의 여자들 고생이 말씀이 아니시다. 입식 부엌에서 앉지도 못하고 일하다 보면 허리가 휘신다. 하지만 여자들 못지않게 괴로운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네 ‘위장’이다. 둘러보시라. 떡국 전골 약과 다식 녹두빈대떡 쇠고기산적 굴전 파전 북어조림 조기찜 식혜 배 사과 감 밤…. 이루 열거하기 벅찰 정도다. 올해는 기필코 다이어트를 해야지 결의를 다지다가도 이런 음식물들 앞에서는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야 만다.
그러나 흩어진 가족들이 모처럼 만에 만났으니 술도 불콰하게 한 잔 할 일이다. 형이 아우 돈 좀 따먹겠다고 덤비고, 형도 이에 질세라 네 놈에게 이 형님께서 한푼이라도 적선할 줄 아느냐고 덤벼대는 소위 고스톱판도 명절이면 그리 흠이 될 게 아니다. 장모님, 저 늦잠 좀 자요 하면, 예끼, 이 사람 해가 중천에 떴는데 늦잠인가, 사위 궁둥이 한 대 툭 쳐가면서 장모님이 씩 한 번 웃어주는 장면, 명절이면 흠 될 게 없다.
먹고 마시고 흥겨우면 그만이지 명절에 미주알고주알 도덕 따지는 것도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명절이라고 해서 이 땅의 우국지사(?)들은 그냥 즐기는 법이 없다. 명절은 자고로 시국토론장이었다. 때로는 형률님 동생, 두 동서지간의 정치적 입장이 달라 언쟁에 얼굴이 붉어질 수도 있겠다. 분위기 심드렁해지면 윷이나 한 판 놓으시든지. 녹두전에 소주나 한 잔 더 하시든지.
명절이면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모여 앉아서 스낵을 먹으면서 게임을 한다. 할머니는 녀석들아, 먹을 것이 쌔고 쌨는데 뭔 놈의 과자냐, 타박 하신다. 아이들은 아랑곳없다. 녹두 빈대떡보다는 포테이토칩, 닭백숙보다는 프라이드 치킨. 아이들은 이미 자극적인 맛에 익숙하다. 바싹 기름에 튀긴 음식에 입이 길이 들었다. 연날리기 자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술래잡기 다방구 오재미 찜뽕…. 먹는 것까지는 좋은%B데, 아이들은 먹어도 옛날처럼 뛰어 놀 생각도 않고 컴퓨터 앞 차지다. 이래저래 피둥피둥 살만 찐다. 자, 이럴 때 이런 이야기로 아이들을 한 자리로 불러 모아보자.
"내가 아는 사람이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일이 급해서 당장은 가지 못하고 넉 달이 지나서 그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넉 달 전에 낳았다는 그 집 아이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글쎄, 그 집 아이가 무려 650㎏이었단다. 내가 60㎏이니까 내 몸무게의 열 배나 되는 아이를 한 번 생각해봐라. 끔찍하지?"
아이들은 "거짓말!"이라며 뜨악한 표정을 지을 것이 분명하다.
"잘 들어보렴. 우리가 먹는 닭들은 날개조차 퍼덕일 수 없는 비좁은 닭장 안에서 길러진단다. 하루 종일 불을 켜놓으면 미련한 닭들은 낮인 줄 알고 종일토록 모이만 먹는단다. 그러면 엄청난 속도로 살이 찌지. 인간은 그것도 모자라 닭의 모이에 엄청난 양의 성장호르몬제를 넣는단다. 그것도 모르고 닭들은 하루 종일 성장 흐르몬제가 섞인 모이를 먹는 거야. 그 결과 엄청난 속도로 살이 찐단다. 그 성장 호르몬의 양을 인간에게 비유하자면 막 태어난 아이를 18주만에 650㎏으로 만드는 양이란다. 그런 식으로 만든 닭들을 우리가 먹으니 우리 몸이 온전할 리 있겠니?"
역시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래 해진다.
예전에 고기는 축제의 음식, 곧 명절의 음식이었다. 그만큼 고기의 소비량이 적었다. 고기의 소비량이 적었으니 굳이 공장식으로 닭을 대량생산하지 않아도 되었다. 성장호르몬 먹여가며 닭을 기르지 않았으니 닭도 병들지 않았다. 그러나 고기의 소비량이 많아지고 수요량이 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대규모 축산양계 시설들이 가축들을 병들게 한 것이다. 병든 닭들에게는 엄청난 양의 항생제가 투여된다.
가축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규모는 작은 사이즈다. 큰 규모는 결국 가축을 병들게 하고, 지구를 병들게 한다. ‘작은 규모’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다.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경제 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하는 경제구조가 확보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생태학의 고전이라는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이 전하는 메시지다.
과거에 우리는 목이 마르면 콜라를 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슈퍼마켓에는 갈증을 해소한다는 엄청난 음료들이 쌓여있다. 이삼십 년 전 아이들의 욕망의 양과 오늘날 아이들의 욕망의 양은 그 차이가 엄청나다. 명절날 컴퓨터 화면 속의 쇼핑몰에서는 엄청나게 화려한 이미지들이 아이들을 유혹한다. 아이들의 욕망은 더욱 커져 갈 것이 분명하고, 부풀려진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내일도 ‘큰 규모’의 공장들이 분주하게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이 땅의 백성들의 욕망이 작아지지 않는 한 닭들은 죽을 맛이다. 어디 닭뿐이겠는가. 아이들의 위장도, 땅도, 초목도, 갯벌도 죽을 맛이다. 그러나 오늘은 설이다. 녀석들아 컴퓨터 앞에만 있지 말고, 빈대떡 산적 동치미, 먹어도 잘 살 안 찐다는 ‘우리 음식’ 실컷 먹고 이마에 땀방울 돋도록 열심히 뛰놀아랏.
김보일 배문고 교사·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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