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건대 내 문학은 오늘, 이 자리의 현장성보다 육이오전쟁 전후의 내가 살아온 소년기에 큰 줄기를 내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소설가 김원일(63)씨는 그것을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라 했고, 그 한계 인식이 주는 "서늘한 비애를 달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이 자리의 현장성’의 의미를 사건이 아닌 상처로 그 외연을 확장할 때, 그의 문학은 한시도 역사의 ‘현장’을 떠난 예가 없었다.
그의 연작소설집 ‘푸른 혼’(이룸 발행)은 1·2차 ‘인혁당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인혁당 사건은 군사정권이 1964년 대학가의 한일회담 반대시위(소위 6·3사태) 직후 그 배후 조직으로 ‘적발’된 것이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0년 뒤인 74년 유신철폐 시위를 주도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배후로 ‘지목’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사건 희생자들이 이승을 뜬지 올해로 꽉 찬 30년. 이제서야 정부가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내세워 그 의혹을 풀어보겠다고 엉너리치고 있다. 소설은 한 발 앞서 법이 아닌 문학으로 그 진실에, 가해자의 혐의가 아닌 피해자의 훼손된 인권에 다가섰다.
작가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던 바로 다음날 형이 집행된 8명의 이야기를 6편의 중편소설로 재구성하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역사의 질곡에도 끝내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치열한 삶을 공판기록과 관련자 증언 등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현시킴으로써 처연한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여의남 평전’은 인혁당 희생자 가운데 가장 젊은 서른 살로 숨진 여정남씨의 이야기다.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나 헌걸찬 대장부의 기개를 지녔고, 당시 대구지역 학생운동의 대부 격으로 활동했던 그가 곡절 끝에 군사정권의 올가미에 얽혀 든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기 직전 어머니가 선물한 동자상을 삼키며 어릴 적 아버지가 말해줬던 등신불 일화를 떠올린다. "고승들의 등신불 고행을 의식이 절멸되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는다면 교수형의 고통을 이기는데 얼마쯤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동자상 이야기는 물론 허구다.
‘투명한 푸른 얼굴’ 은 교사, 사업가였다가 인혁당 재건위 ‘수괴’로 찍힌 도예종씨의 형 집행 당일 새벽을 다루고 있다. 작품에는 과거를 추억하는 희생자의 ‘뜨거운’ 내면과 형 집행의 ‘차가운’ 절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는 형이 집행되기까지 못다한 희생자들의 이야기, 곧 넋두리를 환상소설 기법으로 풀어놓기도 했다.
이들 소설은 여럿이되 하나이며, 여러 이야기를 하되 단 한마디의 말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권’이며, ‘인간이기에 사유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사건 자체의 역사적 의미나 희생자들의 정치적 신념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죽음 뒤에야 인권을, 자유의 혼을 얻을 수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죽어서야 자유를 얻었던 그 혼이 소설집의 제목 ‘푸른 혼’에 담긴 뜻이라고 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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