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가 이미 ‘기교가 뛰어나면 어리석어 보이고 훌륭한 말일수록 어눌하게 들린다’(大巧若拙 大辯若訥)고 했으니 어리숙함이 지혜와 맥이 닿았다고 믿어온 역사는 오래다. 공자도 ‘군자는 덕이 성대해도 겉 모습은 어리석은 자와 같다’ 했고, 소동파 역시 ‘참으로 용맹한 사람은 겁쟁이처럼 보이고,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어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덜 떨어져 어리숙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바보 같이 구는 것을 처세의 중요한 방편으로 여기는 건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성인, 묵객이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수준을 넘어 이런 처신을 인생의 지혜로 정리한 중국의 선비가 있었다.
정섭(1693~1765). 판교(板橋)라는 호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청의 지방관리를 지내며 기근에서 백성을 구하려다 상관과 충돌한 뒤 면직당했다. 그 뒤로 "병을 얻었다"며 벼슬길을 버리고 낙향해 시(詩) 서(書) 화(畵)를 짓고 그리는데 세월을 보냈는데, 그의 작품 중에 ‘난득호도경(難得糊塗經)’이란 게 있다.
‘호도’가 우리말로 ‘바보’라는 뜻이니 바보인 척하기도 어렵다는 말이다. ‘경서’의 수준으로 자신의 글을 높여 부른 것이 과장이 아닌 것은 이후로 이 ‘난득호도’라는 말이 범상한 중국인의 인생철학을 대변하는 말처럼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집집마다 ‘가화만사성’이니 ‘소문만복래’니 하는 글귀를 붙여 놓은 것처럼 중국 가정에는 ‘난득호도’라는 말이 생활의 지침이라고 한다.
‘난득호도경’을 알기 쉽게 풀어 쓴 ‘바보경’은 험난한 현실을 무사히 견뎌내는 지혜를 담은 책이다.
단순한 것이 자신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아예 ‘얼굴을 두껍게 하여 취한 척, 잘 안 들리는 척, 미친 척, 죽은 척하여 상대가 어찌할 도리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식이다. 어리석고, 서투르고,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특이한 작풍 때문에 양저우팔괴(楊州八怪)의 한 사람에 꼽혔듯 어처구니 없는 내용도 있긴 하지만, 사소한 잘못은 덮어두고 다 함께 화목하자거나, 차이를 인정하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는 인품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대목 등 새겨들을 만한 인생살이의 지혜가 다양하게 담겨 있다.
위(魏)·진(晉) 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정치권력에 등돌리고 죽림에서 풍류를 즐긴 일곱 선비) 중 한 명인 원적(阮籍)에게 딸이 있었다. 위나라의 권신 사마소(司馬昭)는 그 딸과 자신의 맏아들 사마염(司馬炎)을 혼인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원적은 사마소 같이 권력에 빌붙어 위세 부리는 사람과 사돈지간이 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땅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던 그가 낸 묘안은 매일 술에 취해 지내는 것이었다. 두 달 동안 찾아갈 때마다 술에 취해 있는 원적을 본 사마소는 혼사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생각을 접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사마소는 원적에게 국사에 대한 의중을 떠본 후 그걸 빌미 삼아 처벌할 계략을 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꼬투리 잡으러 갈 때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기 때문이다.
입 한 번 잘못 열었다가는 목숨 보전도 어려운 난세에서 술은 처세의 방편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훌륭한 수단이다. 술 취했다고 사람 함부로 볼 일이 아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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