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면적은 서울의 두 배쯤 된다. 인구는 약 1,200만명으로 서울과 비슷하다. 단순히 생각하면 서울 사람들은 도쿄의 절반 정도 되는 집에서 살아야 하겠지만 거꾸로 도쿄의 두 배쯤 되는 집에서 산다. 서울의 주택 용적률이 도쿄의 4배쯤 될 정도로 고층아파트가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국민소득은 일본의 3분의 1 정도인데도 양국 일류 기업 근로자의 급여는 거의 차이가 없다. 주택가 대부분이 나지막한 단층 주택이나 높아야 3층 정도의 단독주택으로 이뤄진 것처럼 일본 근로자는 사회 전체의 %평균임금과 편차가 크지 않은 급여를 받는다. 반면 한국 근로자의 급여는 고층아파트와 같은 구조를 띠고 있다.
한국의 임금 격차는 부문과 기업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같은 그룹 내부, 심지어 단일 기업 안에서도 뚜렷하다. 기업 내부의 임금 격차는 정규·비정규직 사이에서 특히 심각하다. 어떤 기업에서는 업무 내용에 차이가 없는데도 정규·비정규직 임금 격차가 3배에 이른다. 급여 소득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으며 그 결과 급여 소득자 가운데 웬만한 자본가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뒤집으면 그만큼 평균에 크게 못 미치는 저임금 근로자가 많다는 말도 된다.
이에 따라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축으로 한 전통적 노동관은 날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애초에 자본과 노동의 대립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잉여가치 착취를 근본 요인으로 상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전통적 노동운동은 따라서 자본이 빼앗아가는 잉여가치를 최대한 줄이는 것, 즉 파이를 나눌 때 노동의 몫을 되도록 늘리는 데 집중됐다.
경제환경이 바뀐 지금 기업의 파이에서 노동 전체의 몫은 일정 비율로 고정돼 가고 있다. 한도를 넘으면 생산기반의 해외 이전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부른다. 바로 이 때문에 노동 전체에 주어진 파이를 분배하는 과%A정에서의 불평등, 즉 근로자 사이의 불평등이 현실의 문제로 떠올랐다. 노동에 의한 노동 착취의 결과로서, 즉 비정규직의 몫을 빼앗음으로써 국민소득에 대비한 정규직의 고임금이 가능해진 셈이다.
그러니 만국 노동자의 단결은커녕 한 나라, 아니 같은 기업 노동자의 단결을 촉구하는 것조차 공허하게 들린다. 최근 드러난 민주노총의 노선 갈등도 단순히 전략·전술 차이에서 비롯했다고 보기 어렵다. 민주노총 내부의 계층 분화로 새로운 계층의식이 생성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노동 내부의 계층분화만이 아니다. 흔히 소비불황이라고 하는 최근의 경제상황 해소방안으로 부자들이 돈을 쓰게 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순댓국집이나 포장마차에까지 들이닥친 소비불황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는 지적이 많다.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 재편 과정에서 상당수가 저소득층으로 밀려났다. 이들은 소득 감소로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다. 다행히 중산층에 남은 사람도 조기퇴직은 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다. 평균수명까지 늘어나 적어도 30년의 노후에 대비해야 하니 돈의 여유는 있어도 마음의 여유는 없다.
경제정책 노선을 놓고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계층 분화와 격차는 날로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지만 사회적 합의는 성장 우선론으로 기울어 가고 있는 듯하다. 다만 정책당국은 이런 합의가 ‘성장이냐, 분배냐’가 아니라 ‘격차냐, 빈곤이냐’의 선택이라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장 우선 정책은 필연적으로 거품을 키우고 격차를 넓힌다. 그렇다고 분배 우선이나 거품을 빼는 내실화 정책은 투자 부진과 고용 불안, 최종적으로 저소득층의 빈곤을 부른다. 이는 외환위기를 통해 충분히 입증됐다.
성장의 부스러기로라도 당장의 궁핍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더욱 큰 좌절감을 부를 격차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현실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경제가 풀어가야 할 진정한 숙제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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