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2기 취임 이후 첫 국정연설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해 한 언급은 1기 정부 때의 기조를 재확인한 것이었다. 북한을 직접 지칭해서는 핵 야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대전제와 그를 위해 아시아 정부들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는 6자 회담의 유용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게 전부였다.
때문에 새로울 것도, 특별한 시사점도 없는 그저 그런 연설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4년간의 국정을 막 시작하는 시점에서 반복되는 수사의 의미는 결코 이전관과 같다고 할 수 없다. 생략과 간결한 표현 속에 2기의 대북 정책의 방향에 대해 오히려 많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북한을 자극하는 표현이 없다. 2002년 국정연설에선 ‘악의 축’, 2003년에는 ‘무법정권’이란 단어가 북한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됐다. 지난해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들’이란 표현과 비교해서도 달라진 뉘앙스를 풍긴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핵 문제에서 북한과 동격으로 여겨졌던 이란에 대해서는 테러지원국, 자유 발탁국이라고 비난의 수위를 높여 북한에 대한 원론적 표현과는 대비를 이뤘다.
북한이 이번 국정 연설의 발언 수위를 지켜보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음을 감안하면 선과 악의 대립구도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단어들이 선택되지 않았다는 점은 6자 회담의 재개를 위한 긍정적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더구나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미국식 정치를 강요할 권리도, 욕망도, 의도도 없다"고 역설함으로써 취임사에서 밝힌 ‘자유의 확산’이 강제적인 체제 전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다. 북한으로선 가장 반발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한 유화적인 목소리가 전달된 셈이다.
하지만 아직 북한 핵 문제의 진전을 예측하기는 무리다. 부시 대통롄령이 현 시점에서 외교적 해결에 대한 기존 원칙을 재확인한 데에는 북한으로부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아직도 대량살상무기를 추구하는 정권들이 있다"며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주목받지 않고 그 결과를 감수하지 않고는 그럴 수 없다"고 못박았다. 특히 60개국과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의 추진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핵 물질의 확산 등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이 6자 회담에 나서지 않거나 핵 협상의 교착 상황이 장기화할 경우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가 강경 노선으로 선회할 수 있다는 얘기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 국정연설 스케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3일 국정연설은 지난달 집권 2기 취임식 연설에서 제시한 ‘자유의 확산’을 재차 강조하는 데 상당부분 할애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대외정책의 대부분을 차지한 중동 민주개혁을 언급하면서 개혁에 적극적인 아랍권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를 대비시켰다. 모로코 요르단 바레인은 "희망적인 개혁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은 "민주선거가 이뤄졌다"고 칭찬했다. 특히 이라크 총선은 중동에 자유주의를 확산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이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강조했다.
반면 이란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레바논 등은 강도 높게 비판했다. "외교적으로 해결하겠다"며 북한 핵 문제를 비교적 가볍게 언급하는데 그친 부시 대통령은 이란에 대해서는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 주요한 테러지원 국가"라고 성토했다. 사우디 이집트 정부에는 중동의 맹주로서 민주개혁에 모범을 보일 것을 주문했다. 이 때문에 집권 1기 대 테러 동참 여부로 우방과 적을 갈랐던 부시 대통령이 2기에는 자유확산을 기준으로 우방국의 개념을 규정해 이들 국가와 새로운 긴장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지적이다.
국내문제로는 사회보장제도 및 이민법 개혁을 집중 거론했다. 이 두 가지 개혁과제는 민주당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쳐 논란을 빚었던 사안임에도 이날 연설에서 강력한 정부 의지를 표명해 ‘민주당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극단적인 반응까지 나왔다.
"현 사회보장제도를 존속할 경우 2042년에는 기금이 부도날 것"이라는 연설 대목에 이르러서는 의사당 내 민주당 측에서 거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이날 의사당의 귀빈석에는 부인 로라 여사 양쪽에 두 중동 여성이 자리해 눈길을 끌었다. 오른쪽으로 11년 전 사담 후세인 치하 정보기관에 의해 남편을 잃은 뒤 지난달 말 총선 투표를 한 이라크 여성과 역시 지난해 첫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아프간 여성이었다. 바로 뒷자리에는 텍사스주 출신으로 이라크 팔루자에서 사망한 미군 병사의 부모를 불렀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의 의미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사망한 미군 어머니와 이라크 여성은 서로 한동안 포옹해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공화당 일부 의원들은 이라크 총선에 참여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퍼플 핑거’의 의미를 새기기 위해 보라색 양복과 넥타이를 입고 입장했으며 자주색 잉크로 손가락을 물들였다.
부시 대통령은 연설에 앞서 연설문 초고를 무려 20차례나 고치며 백악관 내 패밀리 극장에서 실전연습을 할 정도로 이번 국정연설에 각별한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 국정연설(State of Union)
매년 1월말이나 2월초 미국 대통령이 상하 양원에서 행하는 국정연설(State of Union)은 ‘국가상황에 대해 수시로 의회에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건국 헌법조항에 따른 것으로, 향후 1년간 미국 정부의 대내외의 구체적 정책목표를 의회와 미국 국민에 알리는 정치행사이다. 1790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처음 시작했던 국정연설은 ‘대통령이 의회에 보내는 연두교서’라는 뜻의 ‘President’s Annual Message to Congress’로 계속 불려오다 193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부터 지금의 명칭으로 굳어졌다. 최근 들어서는 미래의 비전 제시보다 과거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고,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당파적 행위로 전락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받고 있다.
■ ‘北, 우라늄 수출’ 보도 갑자기 왜 나왔나
북한이 리비아에 우라늄 핵 물질을 수출한 사실이 사실상 확인됐다는 2일자 뉴욕 타임스 보도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이 신문은 이미 지난해 5월 2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이 리비아에 우라늄을 판매한 증거를 찾아냈다"고 보도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반복된 실험 결과 그 가능성이 보다 확실해졌다는 미 과학자들의 판단뿐이다. 그러나 이 결론조차 리비아 제공분과 북한 샘플을 직접 대조하지 못한 결과 ‘정황적인’것에 불과하다.
도리어 이 정보가 6자 회담 재개를 위해 관련국이 움직이고 있는 시점에 다시 불거졌다는 게 눈길을 끈다. 더구나 2일 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국정 연설 직전에 보도됐다. 핵 전문가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명백한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이 얘기를 과대 포장하고 있다"고 정부 관리를 비난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부시 정부 1기 때는 강경파가 북한 핵 협상의 고비마다 국무부의 협상파를 견제하기 위해 정보를 흘렸다. 그러나 2기 부시 정부가 막 출범한 지금 강경파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또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이 콜린 파월 전 장관처럼 강경파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도 아니다.
경위에 어떻든 이 정보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한 긴장을 높일 수 있다. 이날 열린 미 하원 정보위 청문회에서도 의원들이 이 보도를 인용하며 북한 핵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때문에 이 정보의 반향은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대북 강경파들의 입김이 작용해온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보 제공자가 의도됐던 방향일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정보는 북한과의 협상에 대한 긴박성을 일깨우는 측면이 있다. 꽉 막힌 6자 회담의 국면 전개를 위해 정보를 흘린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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