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민 대령 역할을 맡을 뻔했던 배우 박희순(대신 ‘남극일기’ 출연)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쪽 팔렸어요…’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사부 오태석 선생의 ‘도라지’라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했다. 대한제국 말기 고종이 나라를 뺏기는 과정을 묘사한 연극이라는데, 황제와 그 주변의 어이없는 이야기와 내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 꽤 닮았다는 것이다. 과묵한 박희순의 짧은 촌평은 나에게 여러가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10.26 사태’를 영화화하는 것은 아6직 너무 이르지 않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난 이런 식으로 답했다. "그렇다면 그런 소재를 영화화하기에 적당한 시점을 누가 정해 주는가, 결국 창작자가 알아서 만드는 그 시기가 적절한 시점이 아니겠는가" 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창작자에게는 작품을 만들어서 세상에 보낼 자유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작품을 즐기고 비판하면서 소화할지, 또는 불쾌한 쓰레기로 간주하여 추방해버릴지를 결정하는 건 세상의 몫이니까.
그런 점에서 100년 전 ‘그때 그 사람들’ 이야기보다 25년 전 ‘그때 그 사람들’ 이야기는 분명 위험하다. 그렇지만 아직 일반에게 공개되지도 않았는데, 영화 자체 보다도 영화 외적인 정치적인 문제로 과도하게 이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 꼭 불리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건 마치 영화의 도착이 조금 이를지는 몰라도 해볼 만한 이야기였다는 걸 반증해주는 것 같아서다.
박희순의 ‘쪽 팔렸어요’라는 5자 평은 ‘역사에 대한 무책임한 무례’ ‘역사와 우리자신에 대한 모멸감만을 주는’ 등의 신랄한 어휘로만 가득찬 보수 신문들의 리뷰들을 연상하게 했다. 정확히 그 얘기가 그 얘기다. 그리고 이번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대해서도 간교하게도 보수 신문들은 판결 전에는 내가 노무현 대통령이나 되는 듯 집중포화를 퍼부었고, 판결 후에는 심각한 어조로 표현의 자유를 걱정하고 있다.
이쯤에서 난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내 영화에 대한 변명을 해야겠다. 어쩌자고 남의 돈 수십억 원을 들여 고작 관객을 수치스럽게, 또는 분노하게, 또는 모멸감을 주는 영화를 찍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느낌을 받을 관객이란 정말 정서적으로 예민하면서도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미래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 찬 아주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100분여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상업감독의 광고성 변명이기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수치심과 분노와 모멸감을 느끼신 또는 느끼실 분들께 드리는 질문 하나. "진짜, 도대체, 누가, 당신을 그렇게 치 떨리게 했나요, 임상수의 영화 ‘그때 그사람들’인가요 아니면 역사 속의 진짜 ‘그때 그사람들’인가요?" 한번 숙고 해보시지요.
■ 별난 가위질, 별난 검은 화면/ '블랙코미디' 이보다 진할 수는…
‘그때 그 사람들’이 법원으로부터 ‘삭제 조건 상영’ 결정을 받자 영화계의 반발이 거세다. 완성한 창작물에 스스로 ‘가위’를 대야 하는 제작사의 아픔도 크겠지만, 정작 이번 파동의 희생자는 관객이다.
3분56초의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음악만 흐르는 새카만 화면을 보면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빈 스크린을 각자 메워야 하는 일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옛날 영사기가 돌아가다 필름이 끊겼을 때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던 휘파람 소리, 야유나 다시 안 나올지. "영화 도입부의 부마 항쟁 모습과 마지막의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 다큐멘터리 장면을 빼라"는 법원의 결정은 제작사측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 단순히 영화의 상영가능 여부만 결정 날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예정(3일)대로 개봉은 해야 하고, 그렇다고 "예, 예"하며 필름을 자르기엔 억울하고 그래서 선택한 것은 무지(검은)화면으로 내보내기. 촬영하지 않은 영화 필름을 그대로 인화하면 검은 화면이 나오는데, 법원이 지적한 장면을 들어내고 이를 대신 덧붙여 상영하는 것이다. 김윤아의 내레이션과 김수환 추기경의 목소리를 빼기 위해 사운드도 손을 보았다.
제작사인 MK픽처스는 가처분이의신청 제기를 언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저울질하고 있다. 만일 영화 개봉 중에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두 개의 버전을 관객들이 따로따로 보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MK픽처스 관계자는 "원본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할지 여부는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졌을 때 결정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라제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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