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아 아들이 세상에 혼자 설 수 있도록, 거울 한 번 본 적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온 엄마. ‘비’라는 단어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로 아들을 내몰고, 아들의 마라톤 지도를 부탁하기 위해 낯선 남자의 집에 찾아가 청소까지 할 수 있는 독한 엄마(영화 ‘말아톤’).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꾸려 나가며 홀로 4남매를 키우면서도 힘들다 소리 한 번 안 하는 엄마. 아들 딸 일이라면 팔부터 걷어 붙이는 억척 엄마(드라마 ‘한강수 타령’). 눈물을 흘려 가며 자폐아 아들을 가르치는 헌신적인 엄마(드라마 ‘부모님전상서’). 직장과 가정 일을 모두 똑 부러지게 해내고 있다고 믿었던 슈퍼우먼 엄마. 어느 날 아들이 소아암에 걸리자 아들의 치료를 위해 나날이 강해지는 엄마(영화 ‘안녕, 형아’). 어지럼증 때문에 차를 타지 못하자 막내딸의 결혼식장까지 꼬박 나흘을 걸어 가는 엄마(영화 ‘먼길’). 요즘 영화, 드라마 속 엄마들은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답고 또 힘이 세다.
◆ 왜 모성인가 =‘엄마’라는 말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말이 또 있을까. 영국문화협회가 비영어권 100여 개 국가 4만명을 대상으로 ‘가장 아름다운 말’에 대한 설문을 벌인 결과 ‘Mother’(엄마)가 1위를 차지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엄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어머니의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줄을 잇는 건 왜일까.
우선, IMF 이후 가부장적인 부권이 힘을 상실하면서 그 대?엄마가 모든 역할을 떠 안았다는 분석이다. 비유를 하자면 1960년대 영화 ‘마부’에서 아버지를 짓눌렀던 한없는 책임감이 이제 엄마에게 넘어왔다는 것이다. 여성들의 감옥으로 여겨지던 가부장제로부터 도리어 탈출한 이는 남성이고, 남성에게 지워졌던 엄청난 책임감은 엄마의 몫으로 전가됐다.
영화에 한정시키고 보자면, 모성강조 영화붐은 지난해 ‘우리형’ ‘가족’ 등 가족멜로 영화 흥행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다. ‘멜로’라는 장르가 남녀간의 사랑에 국한돼 10, 20대에게 어필하는 장르였던 데 반해 요즘은 부모 자식간의 사랑을 그린 다소 신파적인 멜로에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는 지난해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등이 확장시켜 놓은 중·장년층 문화수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부재, 엄마의 책임감 모성을 강조하는 작품에서는 하나같이 아버지가 부재하거나 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말아톤’의 아빠는 양육의 책임은 전적으로 엄마에게 떠 안긴 채 지방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부모님전상서’의 아빠도 자폐아 아들을 보듬지 않고 창피해 한다. 영화 ‘우리형’이나 드라마 ‘한강수 타령’은 아예 아버지가 없는 가정으로 그려진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모성을 강조하는 작품에서는 전근대적 가치관과 근대적 가치관의 충돌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언뜻 보면 여성들은 기존의 남성들의 역할을 대신하는 탈근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늘,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대리부 성격의 인물이 등장한다. 가부장적인 전근대적 가치관과 그 가치관이 붕괴되고 있는 현실의 충돌 지점을 잘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억척스럽고 강한 엄마가 등장하는 작품에는 늘 아빠 역할을 대신하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마라톤 코치(‘말아톤’)일 수도 있고, 장남(‘우리형’)일 수도 돈 많은 사위감(‘한강수 타령’)일 수도 있다.
◆ 모성강조, 그 모순 = 모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부실한 사회안전망에 대한 책임을 모두 엄마에게 떠 안긴다는 모순이 있다. 자폐아 양육과 교육을 온전히 엄마가 떠맡거나, 붕괴된 가정을 지켜내는 것이 오로지 엄마의 몫이라고 설파하는 것은 모든 문제의 1차적 책임을 엄마에게 전가하는 셈이다.
여성학자 조주은씨는 "끊임없이 ‘모성의 힘’을 칭송하면서 ‘아빠가 못하면 엄마가, 남자가 못 하면 여자가’ 하는 식의 논리를 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실 우리사회의 남성역할이 ‘과도기’이다 보니, 지나치게 엄마의 책임만을 키우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는다.
사실 ‘모성’과 ‘부성’은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모성’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엄마’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엄마도 없다면, 힘든 세상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물론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는 너무 큰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말이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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