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휴대폰 제조업체인 팬택 노사는 올해 임금인상폭을 둘러싼 선의의 공방으로 장안의 화제를 불러모았다. 노조가 ‘회사의 흑자폭과 내년도 경기상황을 고려해 임금을 동결하겠다’는 카드를 내놓자 사측은 긴급 임원회의 끝에 "임금을 올려주지 못할 만큼 회사사정이 어렵지 않다"며 오히려 평균 10%수준의 임금인상을 결정했다.
주목할만한 것은 임금인상폭이 결정된 과정이다. 통상 노조가 회사 내외부적 조건에 상관없이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 지침을 그대로 내세우는 것과 달리 팬택 노조는 회사의 실적자료와 애널리스트, 경제연구소 보고서에 나타난 휴대폰시장환경과 세계경기 전망, 천문학적인 연구개발비용 등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토대로 했다는 점이다. 대의원회의에서 삿대질까지 오가는 난상토론이 있었지만 휴대폰 후발주자로서 성장우선과 이를 통한 고용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결과적으로 노사는 임금교섭에서 ‘상호신뢰의 확인’이라는 더 큰 과실을 얻었다. 노조의 신재덕사무국장은 "회계적인 자료는 사측으로부터 얼마든지 얻을 수 있어 경영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며 "사장의 설명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얼굴을 보고도 알 수 있을 만큼 신뢰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신뢰에 기반을 둔 상생의 노사관계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 단적인 예다.
이처럼 경영정보 공유를 통한 노사간 협력으로 경쟁력을 높이는 기업 사례가 적지 않다. 중견 페인트회사인 디피아이는 사측이 노조에 12월께 사업계획과 경영상의 문제점을 브리핑하고 노조는 이를 바탕으로 임금 등 요구조건을 사측에 제시한다. 외환위기 이전 수십 차례의 교섭을 벌이곤 했던 이 회사는 경영정보의 노사 공유를 통해 소모적인 갈등을 해소하면서 평균 5~7%(기본급기준) 임금인상을 이끌어냈다.
기아차 노조 채용비리를 계기로 대기업 노조는 안팎에서 혁신과 변화의 요구를 받고 있다. 경영·인사에서의 과도한 권한과 이에 따른 부작용, 노조 간부들의 권한오남용과 노조 내부의 불투명성 등 권력화한 대기업 노조의 문제점이 노출되는 데 따른 것이다.
특히 대기업 노조의 경영참여가 생산성하락과 고비용구조로 이어지는 등 왜곡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적지 않다.
한국노동연구원 최영기원장은 "대기업 노조가 인사, 징계권 등 권력을 얻는데 주력하면서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내부감시자로서의 역할은 부족했다"며 "경영정보 공유를 통한 기업이해증진과 생산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밝혔다. 자동차 회사 노사분규를 심층 연구한 노동교육원 이호창 교수는 "해외투자, 공장이전, 전환배치 등에 대한 노조권한은 고용안정 측면에 치우치고 있다"며 "이 같은 견제 위주의 노조 경영참여로는 생산적 협력관계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기업 노조의 도덕적 타락과 이기주의 경향에 대한 자성과 대책마련 요구는 내부로부터도 나오고 있다. 하부영 전 현대차 노조 부위원장은 최근 ‘노동사회 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여러 노조에서 부정부패와 타락의 문제가 %B불거졌으나 이를 심도 있게 분석·조사하여 메스를 대지 못했다"고 자성했다. 노조자금의 유용이나 횡령, 기념품 리베이트, 수익사업비리 등의 사건은 수시로 터져 나오고 대기업 노조의 적립금만 수십억원에서 100억원 대에 육박한다. 하지만 회계감사는 노조 자체 감사에 그치기 때문에 개선의 여지는 전혀 없다. 노동연구원 최 원장은 "최소한 노조 상급단체에 의한 정기감사를 제도화해 내부 투명성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노조권력 비대화와 조합이기주의 경향은 개별기업 근로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밖에 없는 ‘기업별 교섭’ 구조에 기인한 측면이 커 개선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한림대 사회과학부 박준식 교수는 "정규직 근로자중심의 기업교섭 형태를 산업별, 업종별, 전국단위별로 전환, 큰 틀에서 대화와 타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실 대기업 노조의 변화와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업부터 변해야 한다. 대기업 노조의 무소불위적 행태가 후진적인 노사관행을 유지해온 기업에 우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숭실대 국제통상학부 조준모교수는 "대기업들이 치열한 세계경쟁체제하에서 글로벌 브랜드를 지향하면서도 노무관리는 여전히 부정한 담합 등 후진적 관행이 유지되고 있다"며 "투명경영과 기업건전성을 높여 노사관계에 일관된 원칙을 적용하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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