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로 망명한 북한 시인 리진이 1965년에 쓴 시 ‘동상’이 있다. 첫 연만 읽어도 누구 동상인지 담박 알게 하는, 용기 있는 긴 시다. <청동의 폭군이 볼멘 상을 찡그려 들고 물 맑은 대동강의 언덕 위에 솟아 있다 황소 목을 어깨 사이에 박아 세우고 질겁하라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우뚝 있다…>청동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레닌 동상 하나가 실패한 혁명가의 꿈을 기리고 있다. 소련체제가 붕괴하기 전에는 이 도시에 27개나 서 있었다고 한다. 레닌과 위 동상의 주인을 동렬에서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이미지 조작과 허위의식으로 세워진 동상이나 기념물은 언젠가 파괴되는 운명을 맞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또 우상이 많은 사회일수록 민주주의와 멀다는 점을 상기하고자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경복궁의 ‘광화문’ 현판과, 새 영화 ‘그 때 그 사람들’을 놓고 몇 신문이 흥분하고 있다. 그 ‘광화문’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인 정조의 글씨로 바꾸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개성은 있지만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글씨가 내걸린 것이 애초부터 잘못이다.
그의 집권 기간 중 국가 중심부인 세종로에는 세종문화회관과 충무공 동상이 세워지고, 광화문이 중건됐다. 그는 광화문에 자신의 글씨를 써넣음으로써 세종-이순신-박정희로 이어지는 민족적 위인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국민 세금으로 기념물을 세우는 것까지는 좋지만, 충무공 동상과 광화문 현판에 자신의 글씨를 써넣은 것은 염치 없는 짓이다. 국가적 기념물에 글씨를 남기는 것은 권력자의 할 일이 아니다.
평생을 갈고 닦아 일가를 이룬 당대의 서예가들에게 돌려야 할 몫이었다. 당시 손재형 유희강 김응현 김충현 등 고명한 서예가들이 많았다. 예술인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조롱한 행위였다.
정치가로서 양보와 겸손은 사라지고 교만과 독선, 과시욕만 드러난 것이다. 독재자의 전형적 특징이었다. 그 만한 서예 솜씨는 허다했다. 그렇다면 김영삼 김대중씨도 거대 기념물을 세우고 글씨를 남길 만하지 않은가.
돌이켜 보면 충무공 동상과 광화문이 세워지던 1968년에 이미 장기집권의 야욕이 드러났던 셈이다. 한글 현판이기 때문에 보존돼야 한다는 한글학회 등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지만 별도로 논의돼야 할 일이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암살되던 1979년 10월 26일 하루를 다룬 영화다. 아들 지만씨가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가 있다’고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친일 색채’ 부분도 일제 때 교육 받았던 보통사람 수준을 넘는 것 같지 않다.
10.26 사건은 독재자 집단의 자멸 과정이었다.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암살되자 그들을 쏜 김재규 정보부장도 사형되었다. 체육관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던 유신헌법은 영구 집권용이었다. 김 부장이 4.19 같은 민주혁명의 기회를 앗아감으로써, 역사가 더 뒤틀린 것은 아닐까.
10.26 불과 열흘 전에 발생한 ‘부마사태’는 부산대생 500여명의 반정부시위로 시작된 봉기였다. 부산에서 마산으로 번졌다가 계엄령 선포로 종식되었으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비등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박정희씨는 현재적 권력이다. 보수신문들은 ‘비판 언론’을 자처하면서도 누구보다 절대권력자였던 그는 비판하지 않으니, 그들의 훤소와 이중기준이 공소할 뿐이다. 경제를 발전시킨 그의 공로는 충분히 인정해야 하지만 그 명분 아래 희생돼간 인명과 인권에서 교훈을 찾는 일도 중요하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돼야 하고 아직도 밝혀져야 할 것은 많다. 정치가 못하는 부분을 문화가 감당하고 있다. 문화를 통해 국민의 역사적 균형감각이 회복되는 것이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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