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관계가 안정된 기업과 매년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기업과는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2002년 병원노조 연대파업 당시 K병원은 300여일 계속된 파업에도 굴하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 노조는 산별 노조의 지침에 따라 사학연금 납입을 전액 회사측이 부담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경영진은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법과 원칙대로 처리해 안정된 노사관계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반면 G병원은 파업 초기에 노조의 요구를 수용하고 말았다. 무노동 무임금 적용도, 불법파업 책임자에 대한 징계도 거의 없었다. 경영진은 2명을 해고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명은 복직했다. 이 병원은 매년 임금 및 단체협상 때면 불안한 노사관계로 위태롭기만 하다. 노사관계에서 한번 원칙이 무너지면 매년 노조에 질질 끌려 다닐 수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많은 기업들이 ‘파업에 장사(壯士) 없다’고 하소연한다. 하루하루 까먹는 금전적 손실이 눈에 뻔히 보이니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고 공장을 돌리는 게 낫다는 얘기다. 특히 그날 그날 제품을 출고해야 하는 자동차업체, 부품업체들은 노조에 대한 저항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납기와 노사관계 불안은 반비례한다는 말도 있다.
한 자동차 업체 관계자는 "노조가 무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파업 때문"이라며 "밖에서는 노조에 휘둘린다고 비난하지만 노조를 다독거려 공장을 돌리는 게 낫다는 게 경험으로 얻은 법칙"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모르핀 처방은 병세만 악화시킬 뿐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총수가 협상 테이블에 나와야 결론이 내려지는 관행도 회사측이 자초한 측면이 많다.
지난해 현대자동차가 노조의 경영참여를 대폭 허용하는 단협을 체결한 직후, 현대차 경영진과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상호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경총은 "현대차 경영진이 한국 노사관계를 후퇴시켰다"고 주장했고, 현대차는 "회사 발전에 도움되는 길"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현대차 사측의 양보 이후 노조의 경영참여 요구는 한층 거세졌고, 이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홍역을 앓아야 했다.
사측의 전근대적 노무관리가 노사관계를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다. 모 대기업은 회사에 협조하는 소위 ‘어용 노조’를 만들기 위해 ‘공작’을 하다 오히려 강성 노조만 키우는 우를 범했다. 사측의 공작이 알려지면서 노조의 각 계파들이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해 회사 방침에 일단 반대부터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근 기아차 채용비리 사태도 적당한 이권으로 노조 간부를 엮어 노무관리를 해온 회사측 책임이 적지 않다. 기아차는 외환위기 직전 ‘국민 기업’을 부르짖었던 김선홍 회장이 있을 때부터 노조와 사측간 담합 분위기가 형성돼 왔다는 비판이 많았다. 이번 사태도 노조와 경영진의 ‘이권 주고 받기’식 도덕적 타락의 결과인 셈이다.
개별 기업에서 원칙을 가지고 대응하려고 해도 정부의 개입으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되는 상황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경영에 약점이 많은 기업일수록 노조에 휘둘리는 것도 문제다. 경총 관계자는 "사측에 충분한 명분이 있고 노조가 너무 무리하다 싶은 요구를 하는 데도 사측?0? 숙이고 들어가는 사례가 많다"며 "노조가 사측의 약점을 잡아 협상용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난해 GM대우차의 단협 개정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외국인 최고경영자(CEO)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단협을 글로벌스탠더드에 맞게 모두 바꾼 것이다. 경영상의 이유로 조업 단축이 불가피한 경우 노조와 ‘사전 협의’ 하도록 한 것을 ‘조합에 통보’로 바꾸었고 사업양도, 외주처리, 합병 등에 대해 노조와 ‘사전 합의’ 하도록 한 것도 ‘조합에 통보한 뒤, 협의한다’는 내용으로 개정했다. CEO의 의지에 따라 노사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정치 자금으로 수십억원씩 정치인들에게 바치는 회사가 노사관계에서 원칙을 세우기는 불가능하다"며 "경영이 투명하지 않는 한, 기업과 노조의 야합구조나 노조에 질질 끌려다는 상황이 개선될 수 없다"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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