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현대자동차는 ‘투싼’을 출시한 뒤 고객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출고가 지연되면서 신청 고객들이 3~4개월씩이나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다른 한가한 생산라인 인력을 ‘투싼’ 라인으로 재배치해 생산 대수를 늘리려고 했지만 노조의 반대로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투싼 라인 근로자 입장에서는 잔여·특근 수당이 그만큼 줄어드니 동의해 줄 수가 없었던 셈이다. 신차가 출시되거나, 시장에 변화가 있을 때마?현대차가 으레 한 번씩 겪는 일이다.
한 자동차 업체 관계자는 "노조가 수 틀리면 (라인을)멈춘다"고 푸념했다. 산재 위험이 있거나, 불량 제품이 있을 때 라인을 세울 수 있는 규정을 악용해 요구사항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생산 현장에서의 힘의 우위가 노조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단순한 경영 차질을 넘어 경영권의 경계를 침범하는 요구도 빗발치고 있다. 지난해 구조조정을 단행하려던 섬유업체 K사는 노조가 두 달간 파업하는 바람에 더 나빠질래야 나빠질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화섬업이 사양산업이 되자 한계사업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노조는 먼저 신규투자를 할 것을 요구했다. %C적자가 누적되는 상황에서 당장 신규투자에 나서라는 노조의 요구는 도저히 회사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였다. 또 지난해 한 공기업 노조는 교대제 변경을 내세워, 신규인력 3,000명 충원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파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단체협상에서의 최대 쟁점도 노조의 이사회 참여, 노조 지명 사외이사 선임 등 노조의 경영 참여 문제였다.
적절한 경영참여는 근로자의 책임감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대기업 노조의 경영참여 요구 수위는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업체 등 일부 기업의 단협 조항들이다. 한 대기업 단협에는 사업 확장, 합병, 공장이전, 일부 사업부의 분리·양도 시 노사 공동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해외공장을 설립할 때도 노조와 합의 없이 국내 생산물량을 일방적으로 축소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외국기업과 합작이 잘 안 되는 것도 노조의 영향이 크다"며 "합작을 원하는 외국사들도 노조와의 마찰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최재황 정책본부장은 "노조는 조직의 성격상 공장이전이나 합작 등과 같은 정책 결정을 할 때도 조합원의 단기적 이익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조가 경영진 인사낍나 직원 보상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난해 금융통화위원 선임과정에서 한 금통위원은 한국은행 노조에 ‘중립적인 통화정책을 수행할 것’이라는 각서를 쓰고서야 출근할 수 있었다. 주인 없는 공기업에서 벌어지는 ‘낙하산’ 사장과 노조와의 이면 합의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해 모 은행이 인원 정리를 시작하자 노조측은 노조에게 밉 보인 인사들에 대해서는 "위로금을 지급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노조에 권한이 많다 보니 이권 개입의 유혹도 많을 수밖에 없다. 2003년 전남 여수산업단지에 입주한 기업체의 노조집행부 2명은 생산직 채%용과정에서 수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이 업체 직원들의 연봉은 3,000만~6,000만원에 달한다. 경제단체 한 관계자는 "일부 공단에서는 특정업체에 취업하려면 2,000만~3,000만원을 노조집행부에 줘야 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다"고 전했다. 힘 센 노조가 있는 기업에서는 아예 자판기·매점을 노조가 운영하고 있다. 명절 때 직원용 선물을 구입할 때나 건강검진1? 업체를 선정할 때도 노조가 특정 업체를 미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몇 년 전 식당 운영권을 노조에 맡겼더니 식당 직원들이 노조를 결성해 운영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다시 회사측에 운영권이 넘어오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일부 노조의 문제를 침소봉대해 노조의 건전한 경영참여까지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주희 연구위원은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경영참여는 불가피하다"며 "공장의 해외이전과 같은 중요한 고용 조정이 있을 때 노사가 합리적으로 협의하는 것은 노사 협력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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