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애들이나 보는 거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보면 당황할 것 같다. 수많은 상징과 암시로 가득 찬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그림으로 엮어 어린이가 이해하기에는 버거울 듯 싶고, 어른이 봐도 한참 생각해야 한다. 글보다 그림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 그림책이지만, 이 책의 그림을 읽으려면 더욱 공을 들여야 한다. 그로테스크한 상상 혹은 더러 악몽 같은 그림들을 편안하게 보기는 어렵다.
호주 청소년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존 마스든이 쓰고, 역시 호주 화가로E ‘천재적’이라는 평을 듣는 숀 탠이 그림을 그렸다. 글을 짧지만 그림은 심각하고 메시지는 매우 비판적이다. 공격의 대상은 제국주의다. 토끼는 순한 토끼의 탈을 쓴 제국주의로 등장한다. 오래 전 어느날 토끼들이 온다. 토끼들은 점점 불어나 온 나라를 점령한다. 나무를 베어내고 도로를 닦고 공장을 세우고 친구들을 쫓아내고 아이들을 훔쳐간다. 맞서 싸우지만 패배한다. "누가 우리를 토끼들에게서 구해줄까?" 황폐해진 들판에서 탄식처럼 울리는 말, 그게 끝이다.
이 작품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일종의 우화다. 그림이 글을 압도한다. 화가는 사실적인 묘사를 버렸다. 토끼는 전혀 귀엽지 않다. 길고 날카롭게 뒤로 젖힌 두 귀, 칼끝처럼 뾰족하게 땅을 찌르고 선 다리, 잔뜩 부풀어올라 제복 혹은 갑옷처럼 보이는 옷차림은 거만하고 위협적이다. 토끼들의 탐욕이 건설한 공장과 기계문명, 그로 인해 파괴된 자연과 문화를 표현하는 그림들은 음울한 은유의 퍼레이드다. 장면마다 숨어있는 소품들, 예컨대 지구의나 지도, 시험관, 톱니바퀴와 시계, 눈동자 하나하나가 일종의 상징이다. 암호 해독하듯 찬찬히 살필 필요가 있다. 그림이 문자를 능가하는 언어일 수 있음을 새삼 실감할 것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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