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를 일본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던 참혹한 시기라고만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골드러시’ 이야기는 적잖은 호기심거리다. 게다가 당시의 황금 캐기 대열에 장삼이사들만 동참한게 아니라, 내로라 하는 문인들까지 나섰다는 건 놀랄 일이다. 이 시기 한반도 전역에서 열풍 같이 일어난 골드러시의 실체, 거기서 희비가 엇갈린 인간 군상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추적한 ‘황금광시대’는 식민지 시기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세태를 발굴해 ?%D柰냘杉募?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재미나게도 저자가 젊은 국문학자다. 1930년대 도시풍 서정시를 연구하다 우연히 당시의 황금열풍을 알게 된 전봉관(34)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려고 본업인 국문학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5년을 광업 자료조사에 매달렸다. 그동안 이 국문학자의 책상 위에는 시집이나 소설책, 문학이론서가 아니라 복사한 광산지도와 광업사 서적, 일제시기 광업법령집이 뒹굴었다.
작업이 이색적인 만큼이나 내용도 흥미진진하다. ‘낮에는 금을 캐고 밤에는 글을 쓰는 문인’을 소개한 대목은 이렇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E 돈이다, 황금이다’ 부르짖는 세태를 ‘황금부족증’이라고 비판했던 소설가 채만식은 1938년 여름 어느 날 고민 끝에 금광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 무렵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물러난 논객 설의식도 함께 했다.
펜 대신 곡괭이를 든 문인들은 또 있다. ‘봄봄’ ‘동백꽃’ 등을 쓴 김유정, ‘복덕방’ ‘해방전후’ 등 주옥 같은 단편을 쓴 이태준도 역시 이 대열에 동참했다. 특히 김유정은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 이른바 ‘금광 3부작’을 써 당시의 골드러시를 작품에 반영했다.
문학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김기진은 1930년대 초에 제%C일 먼저 금광으로 달려간 명사 그룹에 속한다. 당시 평북 삭주 교동광산에서 금맥을 찾아 졸지에 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자, 사회부장이던 그는 금전꾼 밑에서는 기자 노릇 할 수 없다며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실업자 신세로 얼마간 지내던 그 역시 ‘노다지를 캐서 신문사 하나 차리겠다’며 평남 안주 광산에 뛰어든다. ‘원고지에서 금맥을 캐라’는 충고를 뿌리친 문인들은 한결같이 낭패만 보고 빈털터리로 고생했다.
하지만 광맥을 캐낸 시대의 행운아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 첫째 가는 사람이 평생 광산을 누비고 다니며 ‘?%8껑膚?(黃金鬼)’라는 별명까지 얻은 최창학이고, 두 번째가 방응모다. 둘 다 졸부가 됐지만 최창학이 사리사욕만 채운 반면 방응모는 지역사회와 타인들에게 베푼 쪽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전 교수는 지식인들까지 황금에 달뜨게 만든 당시의 골드러시를 "금본위제 정지", 그러니까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균열로 생긴 해프닝이라고 해석한다. 이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당시의 신문, 잡지 기사와 삽화, 통계자료도 여럿 함께 실어 재미있게 볼만한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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