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집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간혹 "거실이 도서실 같네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여느 집과는 달리 거실에 TV가 없고 책장과 책상만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 거실 풍경은 이렇다. 보통 TV가 버티고 있는 정중앙 벽에는 각종 동화책과 전집류가 빼곡 들어찬 책장 두 개가 놓여 있다. 바로 맞닿아 책상 두 개가 있고, 반대쪽 벽에는 소형 책장 세 개가 나란히 서있다. 벽면에는 대형 세계지도와 한국지도가 걸려 있다.
거실은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숙제를 하고 엄마 아빠와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도서실인 셈이다. TV와 소파는 안방으로 옮겼다. TV 옆에는 아이들의 시청시간을 제한하고 어겼을 경우의 벌칙을 규정한 ‘TV 사용 가족규칙’이 붙어 있다. 아이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한 시간씩 만화만 볼 수 있다. 대신 두 아이에게 책을 월 5만원어치씩 사주기로 약속했다.
2002년 2월부터 TV 없는 생활을 해 온 오세훈(44·KFI 대표)씨 집 거실도 비슷하다. 중앙에는 커다란 책상과 사무용 의자 다섯 개가 놓여 있다. 거실 정중앙 벽에 TV를 설치한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파나 안락의자는 사라진 지 오래다. TV를 치워낸 거실퓽? 아이들의 놀이공간이요, 도서실이자 작업실로 변했다. 거실 한쪽에는 아이들이 책상에서 찰흙으로 만든 작품과 종이상자를 찢어서 만든 장난감이 수북하다. 거실에서 TV가 사라진 이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더 많이 읽고 만들기 놀이를 좋아하게 됐다.
8세와 4세 남매를 둔 주부 심진혜(35)씨는 거실에 있던 TV를 평소 창고처럼 이용하는 골방으로 옮겼다. TV와의 물리적 접촉을 줄이기 위해서다. 심씨는 "가족 공동의 공간인 거실에 TV가 있으면 아이들에게 노출 빈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TV를 보려면 평소 잘 이용하지 않는 골방으로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물론, 아이들의 TV 시청시간도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거실에 TV가 있으면 부모나 아이들 모두 TV를 보고 싶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한 명이라도 TV를 켜면 정신을 빼앗겨 가족 모두가 TV 앞으로 모여 계속 보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게 심씨의 설명이다.
아이가 자는 방에 TV를 놓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부모가 TV 시청시간이나 특정 프로그램의 시청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 의학협회 조사 결과, 방에 TV가 있는 어린이들은 1주일에 평균 2시간 30분 가량 TV를 더 보는 것으로 조사됐다.
금연과 금주는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이지만, TV 끄기는 가족 모두가 일치단결?7?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하기 어렵다. 아무리 실천의지가 강해도 TV의 중독성 정도에 따라 금단(禁斷)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따라서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강제할 수 있는 선언문을 만들어 집안에 붙여놓고 엄격히 지키는 게 중요하다.
기자의 ‘TV 안보기 운동’에 동참했던 김영미(39)씨 가족은 TV의 여러 가지 해악에 대해 자녀들과 대화를 나눈 뒤 TV 화면에다 ‘TV 안보기’라는 문구를 써 붙이고 실천에 돌입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준표 가족도 평소 24시간 꽂아 놓던 TV 코드를 뽑은 뒤 TV 화면에 ‘TV 안보기 실천’이라는 문구를 써 붙였고, 출판인 김인수(42)씨는 TV 모니터에 ‘우리 가족은 TV 안보기를 실천합니다’라고 써 붙인 뒤 두 딸과 아내에게 "1개월 간 TV를 보지 말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었다.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신의진(40·여) 교수는 자녀들이 TV와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아예 코드와 모뎀을 뽑아 갖고 다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이 부모가 없는 틈을 타 TV나 컴퓨터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TV 전압을 바꾸기 위한 트랜스(미국 유학 시절 구입한 110V 짜리 낡은 TV를 갖고 있다)와 인터넷 모뎀을 차에 싣고 다닌다. 출·퇴근용 차량에 트랜스를 넣고 다니며 꼭 필요한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만 들고 내리는 것이다.
신 교수는 현재 초등학교 3학년, 중학교 1학년인 두 아들의 유아기부터 TV 시청을 제한했다. 처음엔 병원에서 근무 중인 엄마에게 전화해 "TV가 보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고, 친구집을 찾아가 몰래 보기도 했다. 요즘은 습관이 돼 TV 안보는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구형 TV를 업그레이드할 생각을 포기한 지 오래다.
신 교수는 "아이들이 TV 시청을 막는 것에 대해 %처음엔 불평을 하고 친구 집에서 몰래 보기도 하겠지만, 부모와 사이가 좋으면 결국 따라오게 된다"며 "TV는 중독성이 강한 만큼 자녀들이 TV에 접촉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모가 TV 시청을 제한하면 아이들은 당장 컴퓨터로 눈길을 돌리기 마련이다. 오세훈씨는 TV를 없앤 뒤 아이들에게 처음 나타난 변화에 대해 "큰 애는 드라마를 컴퓨터로 다운받아 보기 시작했고, 둘째는 매일 한 시간 이상 컴퓨터 게임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TV와 컴퓨터는 거의 ‘동격’이다. 중독성이 강해 어린이의 지능발달과 건전한 인격성장에 치명타를 입힌다. 때문에 TV 끄기를 실천하려면 자녀의 컴퓨터 이용을 함께 통제해야 한다. 연세대 신 교수는 "여학생은 인터넷 채팅, 남학생은 게임에 중독되는 경향이 강하다"며 "자녀가 다른 놀이에 관심을 갖도록 주변 환경을 바꿔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TV 안보기 행동요령
● TV 화면에 ‘TV 안보기 선언문’과 활동계획표를 붙여두고 코드를 뽑는다.
● TV 화면에 검정색 테이프를 붙이거나 보자기로 감싸는 이별식을 한다.
● TV 안보기 포스터를 만들어 집안 식구들이 손도장을 찍는다.
●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고 비디오도 보지 않는다.
● TV를 안보는 동안 가족들이C 할 일을 의논한다.
●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칭찬해 준다.
● TV는 아이들이 쉽게 켤 수 있는 거실에 놓지 말고 안방이나 골방으로 옮긴다.
● TV에 관심이 집중되지 않도록 거실에 책이나 놀이기구 등을 비치한다.
● TV를 꼭 봐야 할 경우 TV 시청일기를 쓰도록 유도한다.
● 시민단체에서 실시하는 미디어 교육에 참여한다.
■ 성공 여부는 아빠에게 달렸다
부모가 변하지 않으면 TV 끄기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자신들은 아이들 몰래, 또는 아이들이 잠자리에 든 뒤 실컷 TV를 보면서 아이들에게만 보지 말라고 강요하면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앞장서 실천해야 아이들도 따라온다. 특히 아빠의 역할이 중요하다.
초등학교 1, 3학년 남매를 둔 주부 차모(38)씨 가족은 TV 안보기 운동을 시작한 지 2주 만에 포기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함께 참여할 뜻을 보였으나 며칠 지나면서 나 몰라라하는 아빠 때문이었다. 평일에는 귀가시간이 늦어 아이들이 잠든 시간에 마감뉴스만 보는 정도였지만 주말에는 무제한으로 TV에 매달렸다. TV 끄기의 취지를 아무리 설명해도 피곤에 찌든 아빠는 통제불능이었다.
평소 귀가가 늦던 아빠가 오랜만에 저녁 7시에 퇴근하면서 TV 안보기 계획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아빠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리모컨부터 찾았고%D, 아이들이 숙제를 하는데도 끌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도 평일에는 비교적 잘 따라주었지만 보상심리 때문인지 주말에는 인센티브(용돈)를 제공해도 소용이 없었다. 공부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리려는 듯 TV와 컴퓨터 사이를 종일 오갔다.
초등학교 4학년 영은이 가족도 아빠 때문에 애를 먹었다. 아빠는 TV 끄기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뉴스와 골프채널은 안 볼 수 없8다. 스트레스는 TV 소리로 풀어야 한다"며 자주 제동을 걸었다. 휴일이면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소파에 앉는 아빠 때문에 영은이도 저절로 TV 앞에 앉는 경우가 많았다.
TV 시청은 전염력이 무척 강하다.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보게 되면 다른 사람도 영향을 받게 된다. 더욱이 부모가 먼저 TV를 켜면 자녀들의 시청을 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조용하던 집에 TV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던 아이들의 주의력이 산만해질 수밖에 없다. TV 끄기에 실패한 가정에선 공통적으로 아빠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이 발견된다. TV 안보기 운동에 참여한 주부들은 한결같이 "대?%7箕慣? 남편들이 달라져야 가족문화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한다.
주부 신연경(38)씨는 "주변 엄마들에게 TV 안보기 운동을 권했으나, ‘아빠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참여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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