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정치에 대한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방과)의 발언을 들은 지가 꽤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래 그의 ‘투명하게 당파적이되 넉넉하게 공정한’ 정치평론의 중독자였던 나는 아직도 그 금단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피정(避靜)은 사뭇 길어질 모양이다. 자신이 주재해온 저널룩 ‘인물과 사상’ 종간호(33호) 머리말에서 강 교수가 힘 빠진 목소리로 자신의 ‘퇴출’을 공식화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강 교수는 이 머리말에서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의 개화(開花)를 침울한 눈길로 살핀?%D?. 그는 인터넷이 참여와 연대를 확산하면서도 한편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비대해진 인터넷 공간이 거기 눈독을 들이는 금력과 권력을 지렛대로 ‘규범 테크놀로지’의 위상을 갖게 됐다고 지적한다. 인터넷이 전통적 지식인의 글쓰기를 포함한 오프라인 행위까지를 규제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예닐곱 해 전 문학평론가 정과리씨가 인터넷에서 ‘문화의 크메르루주’를 불길하게 예감했을 때의 조심스러움과 통하는 바 있다. 정치와 사회를 보는 눈이 아마도 꽤 다를 이 두 전통적 지식인이 인터넷의 무정부주의적 기능항진에 똑같이 난감해 하%F고 있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인터넷이 정치를 비롯한 시사 쟁점들의 공론장 기능을 흡수함으로써 이 분야의 종이 출판을 뿌리부터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정치평론으로부터 퇴각한 결정적 이유는, 그의 말에 따르면, 민주당 분당 이후의 한국 정치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가 이른바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 절대 다수의 생각과 충돌했음을 털어놓은 뒤, 그 때의 유일한 해법은 자신의 ‘퇴출’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강 교수의 이 글을 읽으며, 아직도 더러 정치에 대한 발언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어쩔 수 없이 되돌아보게 되었다. ?%簾컸玖? 나는 아마 인터넷에 대한 이물감이 강 교수의 경우보다 훨씬 더 클 듯하고, 그의 경우보다는 훨씬 덜하겠지만 ‘개혁주의자들’의 조악한 정치공학에, 그가 너무 많이 보고 겪었다는 ‘개혁주의자들의 어두운 면’에 물릴 만큼 물렸기 때문이다. 개혁 담론에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글쟁이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 종이 매체에 정치 논평을 늘어놓는다? 무참함이 없지 않다.
개혁의 타락이든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의 무정부주의든, 그것들은 근원적으로 (넓은 의미의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맞물려있을 것이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어쩌다 걸친 예비군복처럼 내?%E湧? 욕망들을 날것으로 풀어놓았고, 노란색 개혁 상표는 못난이의 팔에 둘린 완장처럼 그 음습한 욕망들을 거칠게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욕망은 인간 존재의 디폴트값이고, 그래서 그런 ‘어두움’이 탈정치의 면허증이 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내가 강 교수에게서 배운 바이기도 하다. 강 교수 같은 열정적 지식인이라면 더러 인터넷의 바다에 뛰어들어가, 빛 좋은 개혁 담론의 안쪽으로 진입해, 사나운 욕망들의 해일에 부대끼며 예전처럼 시비곡직을 다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 교수의 체질에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결국 %A‘현대사 산책’이나 ‘인간학 사전’ 같은 교양주의로 선회하며 거기서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발견하게 됐는지 모른다. 그것은 나 같은 강준만 정치평론 중독자에겐 서운한 일이지만, 이런 교양주의의 밭을 일구는 일도 정치의 바탕인 인간의 욕망 문제와 종국엔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브가 태어난 날부터 인간은 이미 정치적 동물이었다. 강 교수의 새로?%E? 글쓰기가 깊은 곳에서 현실정치와 소통하고, 그 큰 틀의 정치평론이 인터넷에서까지 그림자와 메아리를 얻는 표준적 규범텍스트가 되길 기대한다. 그는 아직도 지식인들의 지식인이고, 논평가들의 논평가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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