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월25일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서 작고했다. 36세였다. 리보르노의 유대계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일찌감치 가업을 걷어차고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1906년 파리로 가 정착했다. 처음에는 몽마르트르에서, 뒤에는 몽파르나스에서 보낸 14년의 세월 동안 그는 결핵,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에 휘둘리면서도 작품 활동에 정진해 회화와 조각 분야에서 걸출한 작품들을 남겼다.
모딜리아니가 몽파르나스에서 그린 그림들은 힘찬 선과 섬세한 색조에서 그가 영향을 받은 세잔이나 피카소의 걸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너무 일찍 죽은 탓도 있겠지만,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당대 파리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주정뱅이 예술가였을 뿐이다. 가업을 잇지 않은 대가가 혹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업을 이었다면, 오늘날 모딜리아니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모딜리아니는 이른바 에콜드파리의 일원이었다. 파리파(派)라는 뜻의 에콜드파리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파리에서 활동했던 유대계 외국인 화가들을 가리킨다. 러시아 출신의 샤갈, 불가리아 출신의 파스킨, 우크라이나 출신의 민싱, 리투아니아 출신의 수틴, 폴란드 출신의 키슬링과 고틀리브 같은 이들이 에콜드파리 작가였다. 그러니까 에콜드파리는 세대적·인종적·공간적 조건의 공유를 암시하는 말일 뿐, 어떤 동질적 예술이념을 전제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나라 출신의 이 예술가들은 제 출신지의 예술 전통에서 이탈하지 않은 채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을 그리며 다양한 개인주의 예술을 확립했고, 그럼으로써 파리를 진정한 국제 예술도시로 만들었다. 어찌 보면 파리는 외국인들의 힘을 빌어 영혼의 속살을 얻은 도시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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