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류를 폭정에서 자유롭게 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야심찬 2기 취임연설을 놓고 세계가 떠들썩하다. 미 대통령 취임연설이나 국정연설에 원래 유난히 거창한 이념적 수사가 많은 것을 생각하면 유별난 반응이 어색한 감도 있다. 하지만 미국과 세계를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위협에서 해방시킨다며 전쟁을 거듭한 부시의 행보에 이래저래 시달린 외부세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그만큼 불안을 느끼는 인류가 많다는 것을 국제 여론조사 결과들이 뒷받침한다.
그런데 떠들썩한 논란이 ‘자유 확산’과 ‘폭정 종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색한 정도를 넘어 어리석게 보인다. 미국의 건국이념까지 뒤져 부시의 소명의식과 성전(聖戰)의 뿌리를 찾는 지지론을 굳이 나무랄 건 없다. 그러나 비판론조차 ‘자유’의 명분에 수긍하면서 다만 원초적 이상을 구현하는 어려움을 지적하거나, 고작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행보를 경계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얘기다. 그 소명의식만은 진정한 것인 양 착각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영국의 석학 에릭 홉스봄의 혜안이 돋보인다. 그는 미 공화당 계열 헤리티지 재단이 발행하는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기고문에서, 역사의 교훈과 현실의 장애를 근거로 부시의 ‘자유의 행군’은 실패하기 마련인 위험한 환상이라고 규정했다. 여기까지는 숱한 비판론과 비슷한 맥락이다. 정작 돋보이는 것은 강대국의 대외 행보는 본질적으로 이기적 국익을 도모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이런 제국의 행보는 더러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만, ‘테러와의 전쟁’에서 보듯이 우리 시대를 야만화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지적이 아니더라도, 부시의 ‘자유 확산’ 선언은 무엇보다 미국의 이기적 세계전략의 틀에서 봐야 한다. 집권 1기의 주제인 ‘테러와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언뜻 숭고하고 절실한 명분으로 가린 전략적 의도를 먼저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상 어떤 국가도 진정 이타적인 동기로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진리를 상기하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부시 정부가 테러 척결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세계는 전략적 의도보다 전쟁의 실효성 따위를 논란하는 데 매달렸다. 이어 테러원흉이라는 빈 라덴 체포에 관심 쏟느라 미국이 석유자원 등 전략적 패권 확대를 노리고 있다는 지적은 흘려 들었다. 빈 라덴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전세계 미군 재배치 등 21세기 미국의 패권 전략이 널리 알려져 상식이 됐지만,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위협과 침공 전쟁에 관한 새로운 논란에 묻혔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라크 침공명분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점령통치마저 힘겨운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이 한층 원대한 포부를 천명한 것은 당장은 이라크의 실패를 가리려는 것이다. 또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힘과 이상과 소명을 앞세워 패권 전략을 계속 추진하려는 계산으로 풀이된다. 테러나 대량살상무기 위협 같은 구체적 대상을 내세우기 어려운 처지에서, 한층 막연한 ‘폭정 종식’과 ‘자유 확산’ 구호로 여론을 현혹시키려 한다는 분석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집권 2기와 이라크 총선에 즈음, 미국이 이란 침공 가능성을 부쩍 자주 시사하는 것도 관심을 돌리려는 책략이다. 대수롭지 않은 샤란스키의 폭정 종식론에 경도된 것처럼 선전하고, 이란과 북한에서 쿠바 미얀마 벨로루시 짐바브웨 등으로 대상을 확대한 것도 그 일환이라는 것이다.
이런 냉정한 분석은 부시 2기의 대외행보는 역시 공허한 ‘자유’ 논란 아닌 이라크 정세에 달린 것으로 본다. 정세 안정에 성공하면 패권 전략을 아시아 아프리카로 확대하겠지만, 수렁에 발이 묶이면 몇 년이고 지연될 수 밖에 없으리라는 전망이다. 이라크 인들에게는 안됐지만, 그 수렁이 깊고 험하기를 기원해야 할 아이러니를 세계가 함께 직면하고 있다는 얘기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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