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여고 동창회의 모금에 참여하면서 교육의 힘에 새삼 감동한 적이 있다. 중고교 6년간 우리를 길러 준 모교에 대해서 나이 들수록 깊어지는 고마움, 우리의 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스승들의 가르침,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소중한 친구들, 그 모든 것을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화여고는 1886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회에서 세운 이화학당을 모태로 하고 있다. 120년 전 낯선 땅에 찾아 온 미국의 여자 선교사들은 이 나라 여성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남성 중심의 전통에 억눌려 있던 한국 여성들은 교육을 통해 인간답게 사는 길을 배웠다.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이 시작된 서울 정동의 이화학당 자리에 ‘이화 100주년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 학교 졸업생으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여성으로서 남다른 감회를 갖게 된다.
무슨 인연으로 그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우리의 생을 변화시켰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진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교육 받은 여성의 자각으로 이 나라 발전에 기여할 뿐 아니라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난과 억압 속에 있는 후진국 여성들이 교육을 통해 거듭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진 빚을 갚는 길일 것이다.
이화 100주년 기념관은 이화학당 초기의 건물이 불 탄 자리에 세워졌는데, 동창들의 건립기금 모금이 큰 몫을 했다. 여자학교의 동창 모금은 남자학교에 비해 액수도 열의도 떨어지는 게 현실이지만, 이번 모금을 통해서 그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모교의 교육, 그 시절의 은사님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화학당을 세운 미국의 여자 선교사들에 대해서 나이 들수록 더 깊이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 모금에 기꺼이 참여한 동창들의 한결 같은 고백이었다. 인생의 고비고비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히고 좌절하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또 자기성취의 기쁨을 맛보면서, 자신이 받은 교육에 감사했다는 것이다.
감사의 내용은 단순하다. 학교와 선생님들로부터 깊이 사랑받고 소중한 존재로 다루어졌다는 확신이 한평생의 힘이 되었다는 것이다. "너에게는 누구도 갖지 못한 너만의 개성이 있다. 그 개성을 키워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던 모교의 교육이 인생의 여러 길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여름철 조회 시간에 한 학생이 쓰러진 일이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꾸중하셨다. ‘몸이 아프면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나무 그늘로 들어가지 왜 쓰러지도록 서 있느냐. 조회도 중요하지만 너희들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교장 선생님 말씀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뿌듯하다"고 한 60대 동창은 말했다.
우리의 교육은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앞으로 왔을까. 발전은커녕 퇴보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 학교가 오늘 얼마나 될까.
반세기 전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어떤 학교들이 해 냈던 일을 왜 오늘은 하기 어려울까. 스승에 대한 사무치는 감사로 학창 시절을 회고하는 졸업생들이 없다면 그 교육은 죽은 교육이 아닐까.
그 시절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우정 또한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이번 모금에는 색다른 기부가 여러 건 있었다. 돌아가신 스승과 부모님을 기념하는 기부금, 세상을 떠난 언니나 동생 이름으로 낸 기부금, 세상을 떠난 친구들 이름으로 낸 기부금 등이 있었다.
"저 세상으로 간 친구들의 이름을 모교에 남기고 싶었다. 그 친구들이 얼마나 모교를 사랑했는지 100주년 기념관이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고 두 친구와 자신의 기부금을 함께 보낸 한 동창은 말했다. 그래서 새 건물에 새겨진 건립 기금 기부자 명단에는 죽은 친구들의 이름이 살아 있는 친구들의 이름과 나란히 새겨졌다.
이 글은 나의 모교를 자랑하려고 쓴 것이 아니다. 교육 현장에서 온갖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터지고, 교육 부총리 임명이 난항을 겪어 이십여 일이나 교육수장 자리가 비어 있는 현실이 슬퍼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개혁 개혁 하지만 가장 시급한 교육 개혁은 사랑의 회복이다. 사랑이 사라진 학교에서 무슨 개혁이 가능하겠는가. 신뢰받지 못하는 교육의 수장이 어떻게 교육을 바로 세우겠는가. 교육에 대한 생각부터 정리한 후 개혁을 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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