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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심인광고 - 닫힌 운명의 굴레를 진 채 彼岸의 '열린 광야'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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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심인광고 - 닫힌 운명의 굴레를 진 채 彼岸의 '열린 광야'를 꿈꾸다

입력
2005.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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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씨의 소설은, 커피로 치자면 ‘블랙’같은 느낌이다. 그것도 시류의 어떤 감각을 겨냥해 블랜딩한 것이 아니라, 무모하리만치 진한 풍미의 순수 원두 같은… 해서 그는, 들큼한 다방커피나 툽툽한 카푸치노가 식상해졌거나, 애당초 커피 맛을 제대로 알았노라 자부하는 열성 팬을 아우른 소설가로 우뚝하다. 그래놓고 보니, 그가 집요하게 천착해 온 참경(慘景)의 세상도 ‘블랙’의 쓴 맛을 닮았다.

새 소설집 ‘심인광고’에 담긴 8편의 작품들은 운명적 우울의 세상에 편입한 개체들의 존재론적 고통과 그 운명을 견뎌가는 방식, 혹은 초昰?탐구의 변주로 읽힌다. 도식적으로 보자면, 소설 속 화자들은 대체로 서러운 존재들이다. 그들이 선 자리는 좁고 어두운 공간이기 쉽고,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배회한다.

이혼을 (당)했고, 어느새 회사에서조차 그 존재감이 흐릿해진 마흔 다섯 독신의 ‘나’(‘재두루미’), 가까스로 옮긴 직장의 신입사원 연수프로그램 강사가 필사즉생의 비장함을 가지라며 권한 유서 용지를 쥔 채 ‘삶이 너무 무거우면 어떤 죽음의 사유도 상대적으로 가볍기 마련이어서’ 끝내 내용을 써내지 못하는 ‘나’(‘사해’), ‘어딘가에 박히기 위해 날아가는 탄환처럼, 그러나 실상은 어디에도 박히지 않기 위해’ 질주하는 오토바이 위에서만 자폐적 고질과 타협할 수 있는 ‘나’(‘오토바이’) 등이 그들이다.

‘회사’ 혹은 ‘권력’이 강제하는 허구적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품 ‘사령’의 ‘나’도 있다. 치명적인 돌림병으로 마을 전체가 폐쇄됐고 세월이 흘러 그 지명마저 잊혀진 그 망각의 마을로 발령(명령)을 받아 떠나는 그와, 마을의 입구를 지키며 소통을 통제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됐으나 끊긴 인적처럼 스스로 잊혀진 존재가 돼버린 ‘나’. 그들은 표면상 명령과 지시의 조직사회가 강제하는 소외적 존재이지만 형태와 강제의 정도가 다를 뿐, 현대적 삶의 방식이 이미 명령과 지시의 역장(力場) 안에서 유지된다는 의미에서 그의 소외 역시 운명적이다.

생의 존재론적 질곡과 세상이 강요하는 운명적 고통은, 당연한 말이지만 화자들의 자의식이 빚어내는 반발력의 다른 이름이다. 가령 ‘오토바이’에 나오는, 노망난 화자의 어머니나 복지시설의 수용자가 느끼는 ‘행복’은 자의식 부재의 반증인 셈. ‘저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세상을 인식할 기제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에요.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지요…행복해지려면 행복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요…사물화로의 진행을 돕는 거죠. 존재감 지우기라고 할까.’

자의식으로 무장한, 좁고 어두운 공간 속 화자들이 지향하는 대안공간은 넓고 열린 ‘광야’이고(‘그의 광야’), 민통선 내의 자기 자신 외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완벽한 자유의 공간’(‘재두루미’)이다. ‘세상에 지친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 적의를 품은 사람들, 이 세상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과 저 세상에 대한 극단적인 희망이 그들을 광야로, 광야의 동굴로 가게 했으리라.’ 하지만, 깨어있는 자가 현실에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운명이라면 그 운명의 궤도를 초극하는 일은, 죽음처럼, 세속의 가치와 배치되는 것이기 쉽다. 곧 삶의 아이러니다.

이승우씨 소설의 매력은 치열하고 묵직한 주제적 중량감과, 그 무게를 지탱하는 분석적인 문체, 그리고 사유적인 문장에서 나온다고 본다. ‘객지일기’에 등장하는 한 고시생이 갓 객지생활을 시작한 화자에게 해주는 말 한 토막이다. "객지에서 산다는 건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모래 바람 속을 걷는 것과 같아요, 몸을 칭칭 동여매고 눈도 감고, 그러니까 세상과 접촉하기 위해 자기를 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세상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한단 말입니다, 참된 만남도 없고 휴식이란 더욱 없지요, 그러니까 짐을 풀고 못 살아요." 그는 종교나 철학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선 자리에서 일상의 행위를 뜯어보고 그 공백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메워가는 방식으로 ‘생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세계는 넓고 열린 광야이지만, 그가 선 자리는 늘 좁고 어두운 ‘지금 여기’인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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